신돈 1회 <신돈> -1회- #왕궁의 전경(밤) 어둠 속에 잠겨있다. 자막 “공민왕 20년(서기 1371년)” #선경전의 뜰(밤) 의봉문이 열린다. 둔중하게 삐이걱 -. 그러나 단숨에 활짝 열린다. 실루엣처럼 한 사내가 대문 안으로 들어선다. 신돈:...... 신돈이다. 산발하고 도복을 입었다. 문득 어둠을 뚫듯이 번뜩이는 눈. 그 눈빛에, 선경전이 달빛을 흠뻑 뒤집어 쓴 채 눈 앞에 놓여있다. 신돈:..... 가는 신음이 탄식처럼 새어나온다. 지그시 두 눈을 감는 신돈. 불쑥 그 눈가를 보일 듯 말 듯 적시는 물기. 그 얼굴 위에, 공민왕:(소리) 내가 너를 내 친형제로 여겼다. 피와 살을 나눈 형제보다 더 믿고 의지했거늘 신돈:(두 눈을 번쩍 뜨며) 폐하 나직이 토해내는 신돈. 두 눈을 부릅뜬 채 선경전을 바라본다. 그 선경전에서, 공민왕:(소리) 어서 오시게. 뭘 주저하시는가. 어서 안으로 드시게나 신돈:...... 문득 서러운 떨림. 다시 달빛에 젖은 선경전. 공민왕:(소리) 내가 오늘은 군신지간이 아니라 친구로서 자네를 보자는 것이야. 눈물겹지 않은가. 자네와 내 우정이. 그러니 어서 안으로 드시게 신돈:..... 성큼 걸음을 옮기는 신돈. 선경전을 향해 걸어간다. 그 위에, 공민왕:(소리) 대체 자네와 나 사이에 나누지 못할 말이 무엇이며, 숨길 것이 무엇이며, 다툴 것이 무엇이며, 믿지 못할 것이 무엇인가. 그러니 어서 안으로 드시게. 어서 공민왕의 너털 웃음이 밤하늘에 퍼져나간다. 순간 걸음을 멈추는 신돈. 바싹 곤두서는 신경. 선경전 회랑의 어둠 속에서 무언가 신돈을 따라 재빠르게 움직인다. 신돈이 걸음을 멈추자 동시에 어둠속에서 정지한다. 신돈:..... 엷은 미소가 떠오른다. 천천히 선경전 뜨락을 질러가는 신돈. 그러자 회랑의 움직임도 신돈을 따른다. 밤고양이처럼 소리없이 신돈을 에워싸고 움직이는 자객들이다. 점점 빨라지는 신돈의 발걸음. 자객들의 움직임도 빨라진다. 선경전 계단으로 성큼 올라서는 신돈. 선경전 문을 좌우에서 활짝 열고 달려나오는 환관들. 뒤이어 최만생이 거드름을 피우며 나오더니 계단을 가로막듯 떡 버티고 서서 신돈을 내려다본다. 신돈:(바라보더니) 폐하를 뵈러 들었네 최만생: 몸수색부터 하는 무례를 용서해주시지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환관들한테 눈짓하는 최만생. 환관들이 계단 밑으로 달려간다. 그러나 신돈과 눈이 마주치자 기겁을 하며 물러서는 환관들. 최만생: 뭘 꾸물대느냐. 영도첨의께서 몸수색을 허락하셨거늘 여전히 겁에 질려 떨고 있는 환관들. 신돈:..... 빙긋 웃더니 두 손을 벌려 쳐든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몸을 뒤로 빼며 신돈의 몸을 더듬는 듯 마는 듯 하는 환관들. 최만생: 그만 하면 됐다 살았다는 듯 물러나는 환관들. 최만생: 안으로 드시지요 비로소 허리를 꺾으며 옆으로 물러서 길을 터주는 최만생. 신돈:....... 천천히 계단을 올라 선경전으로 들어간다. #동. 안(밤) ‘용상’ 신돈:.....(그 용상을 바라보고 있는) 문이 뒤에서 닫힌다. 신돈:(문득 허리를 꺾으며) 나무관세음보살 합장하며 무릎을 꿇는다. 그리곤 다시 용상을 바라본다. 빈 용상. 신돈:(눈물이 치솟으며) 폐하. 소인을 친형제로 여긴다 하셨습니까? 소인은 폐하를 소인의 피와 살보다 더 중히 여기었나이다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그 눈물 위에, 공민왕:(격한 소리) 경의 눈에는 이것이 귀신의 형상이요? #영전의 안(회상) 노국공주의 초상화. 공민왕:(그 초상화를 가리키고 또 가리키며) 삼라만상의 이치를 통달한 대사의 눈에 이것이 귀신의 형상으로 보인다면 참으로 속인과 다를 것이 없소이다 신돈:(무릎 꿇은 채) 폐하 공민왕:(막듯이) 경이 내게 말하기를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다 부처님의 법으로서, 사람의 형상이 있고 없고는 죽고사는 것과는 다르다고 하였소.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산 것이 아니요, 육신이 썩어 흙으로 돌아간다고 죽은 것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소이까 신돈: 폐하 공민왕:(울부짖듯) 혼이라고 하였소이다. 혼이 있으면 산 것이요, 혼이 없으면 죽은 것이라고 하였소이다 신돈:(미소 같은)...(그러나 서글픈) 폐하. 신이 어찌 노국대장공주를 잊겠나이까. 신이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노국대장공주의 덕을 생각하고, 잠들기 전에 한번도 노국대장공주의 자비로움을 되돌아보지 않은 적이 없었나이다 공민왕:(벼락치듯, 울부짖듯) 그런데 어째서 이 사람을 죽었다 하는 것이요 초상화를 가리키는 공민왕. #선경전의 안(밤)(현실) 빈 용상. 신돈:..... 엷은 미소. 들릴락 말락 한 인기척. 힐끔 옆을 보는 신돈. 전각의 기둥 뒤로 숨고 있는 원현. 원현:.... 전각 기둥에 등을 대고 가뿐 숨을 삼키듯이 내쉬고 있는 원현. 식은 땀이 흘러내린다. 신돈:.. 비로소 빙긋 웃는다. #영전의 뜰(밤) 명덕태후:(안에다 대고) 뭘 주저하십니까. 신돈이 용상을 탐해 폐하를 해치려고 한 역모가 낱낱이 드러났거늘 (다가서며) 죽이셔야 합니다. 지금 당장 신돈을 죽여 폐하의 위엄을 바로 세우셔야 합니다 #영전. 안(밤) 노국공주의 초상화를 마주하고 앉아있는 공민왕. 수랏상이 차려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건네듯 노국공주에게 술을 따르는 공민왕. 명덕태후:(밖에서) 그 동안 신돈이 폐하를 어찌 대접했습니까. 폐하를 마치 저희집 종놈 부리듯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노국대장공주의 장례마저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나오는 겁니다. 대체 지 놈이 무슨 상관입니까. 폐하께서 노국대장공주를 위해 대궐보다 더 큰 영전을 세우든 태산보다 높은 능을 세우든 지놈이 폐하의 신하를 자처한다면 시비를 따질 일이 아니지요. 노국공주를 잃고 조석으로 슬픔에 잠겨 계시는 폐하를 생각한다면 지 놈이 먼저 나서서 영전 공사를 재촉해야 할 일이 아닙니까 노국공주 밥상의 밥그릇 뚜껑을 열어주고, 수저를 놓아주고 젓가락으로 생선을 발라주고 하는 공민왕. #동. 뜰(밤) 명덕태후: 신돈은 냉혈하기 그지없는 잡니다. 폐하를 위해서도 내 며느님을 위해서도 눈물 한방울 흘린 적이 없는 잡니다. 오직 탐욕이 있을 뿐이지요 (기가 막히다는 듯 커억 웃으며) 그런 자가 부처님의 옷을 빌려입고 불법을 논하다니. 대자대비하신 부처님께서도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영전. 안(밤) 여전히 노국공주의 수랏상을 거들어주고 있는 공민왕. 명덕태후:(밖에서) 죽이세요. 폐하께서 한마디만 내리시면 지금 당장 신돈의 목을 베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공민왕:(수저 위에 반찬을 얹어 산사람에게 내밀 듯 하며) 드세요. 고려의 비릿한 생선내음이 입맛을 돋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웃어보이는 공민왕. 자꾸만 먹으라는 시늉을 하며 초상화를 바라본다. 공민왕의 흐릿한 시선에 그 초상화가 빙긋 미소를 짓는다. 그러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공민왕. #선경전의 안(밤) 신돈: 올바른 길이 아니면 원래 하늘 아래 숨을 곳이 없는 법이다 원현:...... 기둥에 바싹 등을 대고 타는 목을 추스르는 원현. 신돈: 내가 너와 함께 천하를 떠돌아다니며 터득한 것이 그것이었다. 잊었느냐 원현:(숨어서) 나는 청한거사께서 용상에 앉아 계시는 모습이 보고 싶었습니다 신돈:.... 용상을 바라본다. 그러더니 지그시 두 눈을 감는다. 원현: 일을 망친 건 제가 아니라 거사십니다 (신돈을 향해 나오며) 폐하를 죽이고 저 자리에 앉을 기회는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저를 말리셨습니까 신돈:...... 지그시 감은 눈가에 미소. 원현:(눈물이 치솟으며) 형님. 형님의 소원이 무엇이었습니까. 귀천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보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본디 사람이 천하게 태어난 것이 아니고 신분이 귀천을 가른 것이니, 부처님의 법대로 천한 것이 귀한 것이 되고 귀한 것이 천한 것이 되는 세상을 만드는 게 형님의 소원이셨습니다 신돈:...... 여전히 감은 눈가에 미소. 원현:(미친 듯이 용상을 가리키며) 저 자리가 원래 왕기의 자리였습니까? 노국공주가 아니었으면 지금도 연경의 유곽이나 떠돌며 인생을 탕진하고 있을 고려 왕실의 찌꺼기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 자에게는 과분한 자리였습니다 신돈:....... 원현: 어째서 대답이 없으십니까 신돈:...... 원현: 그냥 그 자리에 앉아서 죽음을 맞을 겁니까 신돈:..... 원현: 안광으로 바위를 가르고 허공을 날아오르고 단걸음에 천리를 달리는 그 도력은 다 어디에 쓰실 겁니까. 지금이라도 벌떡 일어나 선경전 뜰로 나가 이놈의 대궐을 다 쓸어버리세요. 손가락 하나만 까딱이셔도 그러고도 남을 힘을 가지고 계시잖습니까 신돈:..... 두 눈을 번쩍 뜬다. 흠칫 발광을 멈추는 원현. 용상을 노려보는 신돈. 순간 찬 바람이 일며 용상을 밝히던 등불이 한꺼번에 꺼져버린다. 순간 원현이 숨이 막히는지 두 손으로 목을 감싸쥐고 꺽꺽거린다. 신돈:....... 차츰 평온을 찾는 신돈. 목을 감싸 쥔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아 질식하듯 숨을 내쉬는 원현. 가만히 몸을 흔들며 웃는 신돈. 그 얼굴이 평화롭다. 그 위에, 신돈:(소리) 어째서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까? #곤성전의 궐문. 앞(밤)(회상) 자막, “15년 전, 공민왕 5년(서기 1356년)” 등불을 밝힌 안도치를 따라 신돈이 온다. 안도치: 연경에서 스님을 마지막으로 뵌 게 언젭니까. 다섯 해는 지났지요? 신돈: 벌써 그렇게 됐나 안도치:(웃으며) 세월이 유수같다고 하더니 눈 깜빡 할 사이에 다섯 해가 흘러갔습니다 (멈춰서 신돈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그간 고생이 많으셨나봅니다 신돈: 그래보이나? 안도치: 보우스님은 원나라에 가서 삼년 수행을 하고 돌아와서 단숨에 왕사가 되셨습니다. 전하께옵서도 보우스님 앞에서는 맞절을 올리십니다. 헌데 편조스님께선 칠 년 넘게 중국천하를 섭렵하며 도를 닦으셨는데도 행색이 전보다 못하시니.... 신돈: 나 같은 땡중과 보우 왕사를 비교할 수야 없지 안도치:(바싹 들이밀고) 왕비전화를 뵙거든 넌지시 부탁을 해보시지요. 보우스님께서 국사의 자리에 오르시면 왕사 자리를 내어주실 지도 모르잖습니까 놀리듯 웃어대는 안도치. 신돈:...... 안도치: 노하셨습니까. 소인의 농이 지나쳐서 신돈: 자네 입담은 여전하군 (빙긋 웃으며) 염려마시게. 모처럼 왕비 전하께서 나같이 미천한 천승을 불러주시니 내 톡톡히 부탁을 드려보겠네 안도치: 스님 (더 바싹) 왕비전하께서 마음 아파하시는 게 뭔지 아십니까? (더 바싹) 전하께옵서 이 나라의 국왕이 아니라 원나라의 꼭두각시......(주위를 살피며 헛기침) 신돈: 어허, 이 사람. 그게 하루아침에 이뤄질 일인가 안도치: 왕비전하께옵서는 자나깨나 그 생각뿐이십니다. 전하께옵서 원에 대한 조공을 철폐하시고 연호를 새로 세워 원의 제후가 아니라 당당한 황제에 자리에 올라 인기척에 입을 다무는 안도치. 곤성전 궐문이 열린다. 최만생이 환관들을 거느리고 나온다. 최만생: 거기 계시는 분이 편조스님이십니까 안도치: 그렇네. 먼 길을 달려오시느라 해질녘에야 도성 안으로 드셨는지라 최만생: 급히 가시지요. 왕비전하께옵서 오래 기다리고 계십니다 길을 터주는 최만생. 허리를 조금 꺾어 안도치에게 합장하고 가는 신돈. 환관들이 길을 밝히며 앞장 선다. 안도치:(바라보며) 제 말씀을 잊지 마십시오 편조스님 대꾸없이 곤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신돈. 안도치를 힐끔 노려보고 따라가는 최만생. 궐문이 닫힌다. #곤성전의 뜰(밤) 신돈:....... 감회에 젖어 전각을 바라본다. 불켜진 전각의 방. 최만생: 안으로 드시지요 신돈:...... 최만생: 왕비전하께옵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신돈:(탄식처럼) 왕비전하께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밤을 새워 책을 읽으시고 나라 걱정을 하시다가 새벽녘에야 침수에 드신다는 소문이 허언이 아니었구나 최만생:(찡그리며) 뭐라고 하셨습니까 신돈: 나무관세음보살 전각의 불빛을 향해 배례하는 신돈. #강안전의 방 안(밤)(회상) 공민왕:(찡그리며) 편조라니 안도치:(당황) 공민왕: 편조가 누구란 말이냐 안도치: 연경의 고려촌에서 전하께 자주 인사를 올렸던 공민왕: 아, 그 땡중 안도치:(마른침 꿀꺽) 공민왕: 노국공주께서 무슨 일로 그런 자를 이 밤중에 부르셨다는 게냐 안도치: 소인은 자세히는 모르옵고 공민왕:(가볍게) 이런 고얀 놈을 보았나. 네 놈이 그 일을 주선해놓고는 시치미를 떼다니 안도치: 망, 망극하옵나이다 황급히 조아리는 안도치. 공민왕:..... 그런 안도치를 힐끔 보더니 가만히 한숨 내쉬는 공민왕. 안도치:(목이 메듯) 왕비전하께옵서 전하를 따라 연경에서 개경으로 떠나시면서 신들을 불러 모으시고 약속을 하셨나이다. 전하께서 고려의 국왕으로 즉위하시는 날 만백성과 대신들이 만만세를 하늘 높이 부르는 소리를 들으시겠다고 하셨나이다 공민왕: 만만세라 안도치: 만세. 만세. 만만세 엎드려 우는 안도치. 공민왕: 내 살아 생전엔 틀린 일이다. 어느 세월에 독립을 할꼬 안도치: 전하 공민왕: 천천세면 충분하다. 원제국의 조그만 변방국인 고려가 어느 세월에 만만세를 외치겠느냐 안도치:(피를 토하듯) 신들이 어찌 만만세를 소리 높여 불러보지 못하고 눈을 감겠나이까 공민왕: 고려의 사직이 오백년이나 이어왔다. 천 년이면 넘치고도 남지 안도치:(보며) 전하 공민왕:(고개 돌리며) 노국공주께서 헛수고를 하고 계신다. 편조가 무슨 힘이 있어 세상을 뒤엎겠느냐 #곤성전의 방 안(밤)(회상) 조용히 앉아 책장을 넘기는 노국공주. 장지문 사이로 바람이 새어 들어왔는지 등잔불이 떨 듯이 팔랑이다 멈춘다. 신돈:....... 가만히 마주앉아 그런 노국공주를 바라보는 신돈. 노국공주:(책장을 넘기며) 소국은 지금 병선 구백 척, 소공 수부 일만 오천 명, 정규군 일만 명을 갖추려고 합니다. 부과된 군량은 한 석으로 계산하면 십일만 석, 집기, 기계는 이루 셀 수 없을 정돕니다만 있는 힘을 다해 성덕에 보답코저 합니다...... 신돈:(바라보는)..... 노국공주:(책장을 넘기고 서너 줄 읽다가)....소국은 연년 가물어 백성은 모두 굶주리고 있기에 아직 군량도 충분히 거두지 놓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현재 있는 병량 칠만 칠백 스물일곱 석을 빼놓고는 내외 공사에 쓸 것이 모두 바닥이 났습니다. 이로인해 대소관헌의 녹미와 국용으로 쓰기 위해 곱절의 세금을 징수하고 또한 중외의 가가호호에 대략 사만 천 석을 준비하였으나 이 이상은 어떻게 하기가 힘이 듭니다......(본다) 신돈:......(미소같은) 노국공주: 충렬왕 실록에 적혀있는 기록들입니다. 아마도 원세조께서 왜국을 정벌하기 위해 고려에서 징발한 군사와 군량미 병선의 숫자일 겁니다. 이때 고려에서 굶어죽은 백성의 숫자가 수천 수만은 넘는다지요? 신돈:.... 노국공주:(다시 다른 책을 편다) 삼만 근의 약재와 삼천 점의 고려청자, 이만 필이 넘는 비단과 종이, 담비가죽, 심지어는 사냥에 쓰일 매와 수천 석의 양곡....(힐끔 신돈 보며) 충숙왕 삼년의 실록입니다. (다른 책 넘기며) 매년 한 해에 열네 살에서 열 여섯 살 사이에 처녀 백 오십 인을 뽑아 연경으로 보내되 필요할 때는 일 년에 두 번 징발할 수 있고..... 신돈: 왕비전하 노국공주:(책을 덮으며) 이러고도 어떻게 고려가 살아 남았습니까 신돈:.......(시큰) 노국공주: 원나라가 요구하는 조공을 다 바치고 나면 고려에는 성한 풀 한 포기 남아 있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고도 부족해 고려의 처녀들을 조공으로 바치다니오 (책을 두드리며) 도처에 이런 기록들이 남아 있습니다. 역대군왕의 실록이 조공사로 얼룩져 있어요. 이러고도 고려가 살아 남았다니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신돈: 왕비전하 문득 입을 다무는 신돈.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앉는 노국공주. 그 볼에 눈물이 흐르고 있다. 신돈:(눈물이 치미는)......(그러나 끄윽 삼키는) 노국공주:(보며) 참으로 대단한 나라가 아닙니까 신돈:...... 노국공주: 이렇게 수탈을 당하고도 이만큼 살아남아 있으니.....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없이 신돈을 애타게 바라보고 있는 노국공주. 신돈의 입가에 감도는 잔잔한 미소. 신돈: 왕비전하. 고려에는 개국이래 스물 네 분의 제왕이 계셨습니다. 태조, 혜종, 정종, 광종 대왕에 이어 스물 네 번째 제왕이 원종이셨습니다 노국공주:..... 신돈: 그런 다음에 충렬왕께서 보위를 이어 받으셨지요.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그렇게 여섯 임금이 계셨으니 지금의 금상께서는 고려의 서른 한번 째 임금이 되시는 것이옵니다 노국공주: 예. 잘 알고 있습니다. 원종 이후에 원에서 내린 고려 국왕의 시호가 모두 충자로 시작된다지요. 재위 중에 원에 지극한 충성을 바쳤으니, 충렬, 충선, 충숙이란 시호를 내렸다는 거지요? 안 됩니다. 우리 국왕께서 사후에라도 그런 수모를 당하시게 해드릴 수는 없지요. 충렬, 충선, 충숙이라니오 신돈: 나무관세음보살 노국공주:(바싹 몸을 내밀며) 나는 몽골의 여잡니다. 내 아버님께서는 굴종을 당하고 사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해 명예를 지키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신돈:...... 노국공주:(타오르는 눈빛) 원제국은 머지않아 망합니다. 몽골의 불모지를 떠나 풍요로운 중원으로 진출하면서 우리 민족은 스스로 멸망의 무덤을 판 겁니다. 거친 양털 옷을 입고 모래바닥에서 자는 대신 비단 옷으로 감싸 입고 고대광실에 누워 주지육림에 빠져있으니 이것이 몽골의 나라라고 할 수가 있는 겁니까 신돈:...... 노국공주: 우리 국왕께서는 당연히 황제의 자리에 오르셔야 합니다. 원제국이 멸망하기 전에 조공의 수치를 벗어던져야지요 #선경전의 안(밤)(현실) 자막 “공민왕 20년(서기 1371년)” 신돈:...... 눈 감은. 노국공주:(그 위에 소리) 우리 세 사람이 연경에서 한 약속을 잊지 않으셨겠지요. 고려는 더 이상 원의 속국이 아닙니다 두 눈을 번쩍 뜨는 신돈. 용상에 공민왕이 앉아있다. 몸을 비스듬히 의자에 기대고 있다. 비웃듯이 신돈을 내려다보는 공민왕. 공민왕: 누구보다 노국대장공주의 은혜를 입은 경이 노국대장공주의 혼을 기리고자 짓는 영전 공사를 끝까지 반대하는 까닭이 무엇이요? 신돈: 근년에 가뭄이 계속되어 백성의 생활이 궁핍하기 그지 없습니다 공민왕: 백성이 궁핍한 것은 알겠으나 경의 곳간이 차고 넘친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 아닌가 신돈:(바라본다) 공민왕:(말할 틈을 주지않고) 바닷물은 마실수록 갈증이 난다고 하더니 경의 탐욕도 그와 같소이다. 옥천사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나 일국을 호령하는 영도첨의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면 멈출 줄을 알아야지. 그러니 조정 중신은 물론하고 저자의 이름 없는 백성까지 신돈을 죽이라 하는 것이오 신돈: 폐하 (자세를 바로하고) 이것이 노국대장공주께서 바라는 일이겠습니까 공민왕:(흠칫) 신돈: 노국대장공주의 상사가 삼 년이나 계속되었고, 폐하께서는 왕륜사 초입에 웅대한 영전을 지으시고 노국대장공주의 영정을 모시었습니다. 영전의 사치스럽고 호화로움이 이미 도를 지나쳤나이다. 그런데도 폐하께서는 부족하다고 하시고 마암에 새 역사를 일으키시니 대체 폐하께서는 노국대장공주의 혼을 기리는 영전을 지으시려는 겁니까. 진시황이 시기할만큼 호화스러운 아방궁을 지으시려는 겁니까 공민왕:(참다 터지듯) 노국공주의 혼을 기리는 영전을 지으라 권유한 것은 내 환심을 사려고 아부를 일삼는 조정대신들이 아니라 경이었소이다 신돈: 옛말에 지나치면 부족함만 못하다 하였습니다 공민왕:(외치듯이) 나는 부족합니다. 삼년 상이 아니라 백년 상을 치러도 내 슬픔을 다 거둘 수가 없소이다. 아방궁이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영전을 지어 그 사람을 기린다 해도 내 슬픔을 다 채울 수가 없어요 신돈:....(바라보는) 공민왕:(눈물이 번뜩이더니) 그렇게도 내 마음을 모르시오 신돈:....(지그시 두 눈을 감는다) 공민왕: 경은 항상 어려운 일을 당하면 나를 위로하고 격려하기를, 이것이 천한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난 곤경보다 더하겠느냐 하였소 신돈:...... 공민왕: 내가 열두 살의 어린 나이로 부왕을 떠나 원의 볼모로 끌려간 신세라 경보다 나을 것이 없었기에 우리가 의기투합하여 고려를 다시 일으켜 세웠소이다 신돈:...... 공민왕: 내가 누구보다 경을 이해하고 경은 누구보다 나를 잘 알고 있소. 이런 우리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두 사람을 맺어준 노국공주의 영전을 짓는 문제로 갈라서서야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신돈:(눈 떠서 보며) 폐하 (간절히) 새 영전공사는 당장 중지하셔야 합니다 공민왕:(터지듯) 고려는 팔십 년이 넘는 세월을 원의 속국으로 지냈어요. 왕국의 체면과 위엄이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졌어요. 그러니 이만한 공사는 감당할만큼 우리의 국력이 강대해졌음을 몽골의 오랑캐들한테 보여줘야지 신돈: 노국공주께서 생전에 산 속을 떠도는 소승을 불러 원에 바친 조공사를 일러주었습니다. 저들이 이 땅에서 수탈해간 것이 필설로 다 헤아릴 수가 없으니 고려의 풀 한 포기도 성한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공민왕:.... 신돈: 노국공주께서는 이렇게 빼앗기고 짓밟히고도 어찌 고려가 살아남았으냐고 눈물을 흘리셨나이다 공민왕:....... 신돈: 폐하께서는 신의 곳간에 양곡이 차고 넘친다고 하셨습니다. 신의 곳간이 차고 넘친다면 신이 어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공민왕:(버럭) 밖에 원현이 있느냐 기둥 뒤에서 원현이 허리를 굽히고 나온다. 공민왕: 신돈의 곳간을 뒤져보았느냐 원현:(진땀) 공민왕: 신돈의 곳간마다 금은보화와 비단이 흘러넘친다는 너의 말이 거짓이냐, 아니면 빈 곳간에 쥐새끼만 요란하다는 저 양반의 말이 거짓이냐 원현: 소인은 본대로 아뢰었을 뿐이옵니다 비오듯 흐르는 땀을 닦는 원현. 공민왕: 일전에 내가 노국공주의 명복을 빌러 왕륜사에 갔을 때 기현 일당이 나를 죽이려 군사를 매복시켰는데 신돈이 나를 구하기 위해 왕륜사로 달려오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갔다고 하였다. 이것이 사실이더냐 원현:.....(부들부들 떠는) 공민왕: 니가 고하기를 신돈이 나를 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 역모가 실패하면 살 길을 도모하고자 그리 한 것이라 하였는데 그것이 사실이 아니더란 말이냐 원현:(진땀 흘리며) 기현의 수하 가운데 이인이란 자가 있사온데 기현이 말하기를 일이 실패하면 신돈이 살아 있어야 구명을 해줄 것이니 일이 늦어져 폐하를 시해하지 못하면 신돈이 폐하를 구원하러 달려와야 모두 무사할 것이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하였나이다 공민왕: 웬 말이 그리도 길고 어려우냐. 나는 신돈이 기현과 같은 일당이냐고 물었다 신돈:(울음이 터지듯) 폐하 공민왕:(노려본다) 신돈: 폐하께서 신을 죽이고자 하시면 어려울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 번거롭게 하지 않으셔도 소인을 죽이실 수가 있으십니다 공민왕:(조금 무안해지는) 신돈:(미소가 떠오르며) 태조께서 고려를 세우신 이래 수백 년간 중원의 강국들과 북방의 오랑캐들이 번갈아 고려를 침입하였습니다. 수많은 전쟁이 있었으나 고려는 전쟁에는 패하여도 적들에게 무릎을 꿇지는 않았나이다. 고려의 땅이 저들만큼 넓어서 그리하였겠습니까? 중원에 비하면 한줌도 안 되는 작은 국토가 아니옵니까 공민왕:..... 신돈: 폐하. 고려와 같은 작은 나라가 어떻게 광활하기 그지 없는 중국의 여러 제국을 맞아 독립을 지킬 수가 있었겠습니까. 첫째는 고려인이면 누구나 다 믿고 의지하는 불심이요, 두 번째는 태어날 때는 귀하게도 태어나고 천하게도 태어나도 그 태어난 신분에 상관없이 능력있는 자는 귀하게 되는 고려의 독특한 신분 제도가 있는 탓이었습니다 공민왕:...... 신돈:(웃으며) 폐하께서는 신을 골려주고 싶을 때마다 신을 가리켜 옥천사의 사노라고 하십니다. 폐하께서 신을 그렇게 놀리실 때마다 폐하의 용안에는 따뜻한 온기가 흐르십니다. 폐하께서 정녕 신의 미천한 신분을 조롱하시는 것이옵니까? 공민왕:(점점 숨이 막히는) 신돈: 폐하 노비의 자식이 폐하 다음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폐하께서 몸소 태어난 신분의 귀하고 천한 것을 묻지 않으셨으니 만백성이 폐하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을 내놓는 것이옵니다 공민왕:(신음 같은) 신돈: 몽골장수 살례탑이 처음 고려를 침공한 이래 일곱 번의 전쟁이 있었습니다. 군신이 함께 강화도로 들어가 항쟁을 계속하는 동안 이 나라의 국토가 어찌 되었습니까. 몽골군의 창칼에 찔려죽고 말발굽에 밟혀 죽는 백성보다 굶어죽고 병들어 죽는 백성이 더 많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폐하, 고려와 고려인은 팔만대장경을 만들었나이다 공민왕:.....(점점 맥이 풀리는) 신돈: 강원도의 아름드리 나무를 베어 동해바다에 띄워 남해를 거쳐 강화도까지 가져오는데 뱃길로 일 년이 넘게 걸렸고, 나무를 바닷물 속에 담궈 또 한 해를 보내고 그런 연후에 나무를 다듬어 그 위에 팔만대장경을 목각하였습니다. 이 일이 믿어지시옵니까 폐하. 고려의 독립을 지켜낸 것은 고려의 무력이 아니라 불심이었나이다 공민왕:..... 자신도 모르게 치미는 눈물. 그러나 이내 삼켜버리는 공민왕. 신돈:....... 조용히 일어나 공민왕에게 사배를 올린다. 마른침 삼키는 원현. 사배를 올리고 나서 일어나는 신돈. 공민왕이 뭐라고 입을 열려는데 또 한번 합장하며 허리를 굽혀 작별을 고하는 신돈. 그 자세로 뒷걸음질 쳐 문으로 간다. 공민왕이 손을 들어 신돈을 제지하려고 한다. 신돈, 허리굽힌 채 몸을 돌려 장짓문을 민다. 공민왕:(애원하듯 내지른다) 그 문을 열고 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야 신돈:(멈칫 서 있는) 공민왕:.... 신돈:..... 밖으로 나간다. 방문이 닫힌다. 공민왕: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는 네 모습이 보고 싶었느니라 부르짖는 공민왕. 차라리 처절한 -. #선경전의 앞(밤) 신돈:..... 빈 뜨락을 바라본다. 천천히 계단을 향해 나아간다. 어둠 속 회랑에서 금속들이 부딪히는 소리. 신돈:..... 그 시선에 자객들의 칼날이 어둠 속에서 번뜩인다. 신돈:..... 그 얼굴에 떠오르는 편안한 미소. 문득 밤하늘을 우러러본다. 여기저기 폭죽이 터지고 그 불꽃이 밤하늘을 가득 메워간다. #개경의 전경 대궐과 관아와 민가의 지붕들. 자막 “24년 전, 충목왕 3년(서기 1347년)” 남대가의 지붕 사이로 스님들의 행렬이 들어온다. #남대가의 골목길 북적거리는 인파를 뚫고 화려한 가사를 걸쳐 입은 스님들의 행렬이 이어진다. 목탁에 맞춘 우렁찬 독경소리가 퍼져나간다. 그 뒤를 따르는 구경꾼들. #광화문. 앞 대궐문이 열렸다. 승려들의 행렬이 대궐 안으로 들어간다. 뒤따라온 구경꾼들을 가로막듯 대궐문이 닫힌다. 웅성거리며 흩어지는 사람들. 광화문의 성벽을 따라 진귀한 풍경이 이어진다. 원숭이 재롱을 보여주고 푼돈을 동냥하는 사내, 벌거벗은 윗통에 구렁이를 칭칭 감은 사내, 남방에서 온 듯한 젊은 부부는 각종 곡예를 부리며 입에서 불을 토해내고 있다. 신돈:...... 산처럼 솟아있는 낙타의 봉을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는 신돈. 편안히 엎드려 입을 우물거리고 있던 낙타가 고개를 돌려 신돈을 바라본다. ‘그 낙타의 눈.’ 신돈, 문득 마른 침을 꿀꺽 삼킨다. 낙타가 몸을 일으켜 벌떡 일어난다. 그 큰 몸집에 눈이 동그래지는 신돈.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난다. 도리질을 하듯 머리를 흔들며 하늘을 향해 푸푸거리는 낙타. 아라비아 복장을 한 사내가 와서 낙타의 목을 어루만져주며 낙타를 진정시킨다. 또 한번 마른 침을 꿀꺽 삼키는 신돈. #남대가의 골목 만두 가게의 몽골주인이 변발을 하고 솥에서 만두를 쪄내고 있다. 솥 주위에 모여 코를 박고 군침을 흘리고 있는 아이들. 주위의 노점에선 각종 음식을 만들어 팔고 있고, 짚신, 유기, 어물, 땔감을 파는 가게들이 줄지어 있다. 북적거리는 인파. 팔관회 밤에 쓸 폭죽을 파는 상인들이 폭죽을 터뜨리며 목청껏 손님을 끌어모으고 있다. #동. 도자기 가게 안 청자로 만든 연적. 그 연적을 소중히 어루만지고 있는 손. 원현이다. 건너편 진열대에서, 도자기를 건성건성 만져보며 그런 원현을 바라보는 신돈. 원현이 연적을 집어 들어 볼에 부벼본다. 기분이 좋은지 빙긋 미소한다. 주인:(원현에게 오며) 그건 은병 하나 값입니다 원현:(놀라며) 은병 하나요? 이 작은 연적이 주인 이래뵈도 그게 고려 청잡지요. 몰락한 대갓집에서 흘러나온 물건입니다 원현:(가만히 한숨을 내쉰다) 주인: 이쪽으로 오시지요 스님. 중국에서 수입한 연적인데 은병 하나에 서너 개는 고르실 수 있습니다 값싼 연적들을 보여주는 주인. 이것저것 고르면서도 미련이 남아 청자 연적을 힐끔거리는 원현. 신돈:.... 그런 모양 쭈욱 지켜보며 씨익 미소짓는 신돈. 옷 속에서 전대를 꺼내 중국산 연적 하나를 사는 원현. ‘청자 연적.’ 신돈의 소매 깃이 연적을 스치듯 지나가더니 연적이 사라진다. 주인을 힐끔 보며 똑같이 생긴 중국산 연적을 그 자리에 놓는 신돈. #동. 거리 물건을 잔뜩 안고 오는 원현. 신돈:(같이 가며) 큰스님이 연적도 사오라고 하셨나 원현:(보더니 천진하게 고개 젓는다) 신돈:(웃으며) 아이구 그럼 우리 원현스님께서 글공부를 하시겠다? 원현: 그런게 아니구요. 큰스님이 애끼시던 연적이 두 쪽이 났는데 정든 물건이라고 버리질 못하세요. 풀을 발라 연적을 붙여 쓰시는데 틈새로 물이 줄줄 새니 뵙고 있기가 민망하지 뭐에요 (손에 꼭 쥐고 있던 연적을 펴보며) 맘에 드실지 모르겠네 (도자기 가게를 돌아보며) 연적 하나가 은병 하나 값이라니 다시 한숨을 푹 쉬며 두 팔에 안은 종이와 물건들을 추켜안고 가는 원현. 북적거리는 인파 속에서 장정 서넛이 거칠게 사람들을 헤치며 오더니 원현과 부딪힌다. 두 팔에 안았던 물건들이 땅바닥에 떨어진다. 장정: 미안하우다 스님 뭐가 바쁜지 서둘러 원현과 함께 흩어진 물건을 줒어주는 장정들. 손에 든 연적이 깨질 세라 손에 꼭 쥐고 장정들이 집어준 물건을 두 팔에 안는 원현. 뒤에서 물건을 집어들던 다른 장정이 서두르다 원현과 부딪힌다. 그 바람에 다시 주저앉으며 팔에 안은 물건을 떨어뜨리는 원현. 장정: 어디 다친덴 없으시우 스님 원현을 잡아일으키는 장정들. 물건을 안고 그 모양을 지켜보고 있던 신돈이 수상한 낌새를 챘는지 정색을 하고 한발 나선다. 원현:(손 내저으며) 괜찮아요 사형. 다친 데 없어요 신돈을 막듯 일어나 서둘러 물건을 집어드는 원현. 장정: 미안하우다 스님 대충 물건을 집어주고 사람들을 헤치고 서둘러 가는 장정들. #동. 국수 가게 후르륵 국수 먹는 신돈. 연적을 살펴보고 있는 원현. 연적에 금이 갔다. 원현: 이 일을 어쩐다 모른척 국수만 먹는 신돈. 한숨을 푹 내쉬더니 종이를 꺼내 펴놓고 물품 목록을 점검한다. 원현: 종이하고 붓과 벼루는 샀고, 약재도 다 샀고......(중얼중얼 맞춰나간다) 여전히 모른척 국수만 먹는 신돈. 원현: 큰스님이 사오라고 하신 물건이 아직 반이나 남았는데 무슨 돈으로 연적을 다시 사나 다시 한숨 내쉬는 원현. 신돈:.... 국수 먹으며 소매 품에서 청자연적을 꺼내 원현 앞에 놓는다. 원현:(놀래며) 아니 이건 그 청자연적..... 시침 떼고 국수만 먹는 신돈. 원현: 편조스님이 무슨 돈이 있다고 이걸 샀습니까 신돈: 원현스님 정성이 하도 갸륵해서 가게 주인이 보시를 하셨네 원현:(주위 살피며) 또 훔치셨오? 신돈: 물건엔 원래 주인이 따로 없는 법. 나는 부처님 가르침을 따랐을 뿐야 국수 그릇을 들어 국물을 꿀꺽꿀꺽 마시는 신돈. 어이없어 바라보는 원현. 연적 집어 들고 벌떡 일어난다. 원현: 주인한테 돌려주고 오겠습니다 원현, 가는데 와아 사람들이 반대편으로 몰려간다. 그 인파에 쓸려 뒷걸음질치는 원현. 겨우 사람을 헤치고 국수가게로 다시 들어서는 원현. 신돈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원현:.... 둘러본다. 보우가 온다. 몰려드는 사람들 여기저기서 “보우선사시다”라고 외치는 소리. 보우를 향해 합장 배례하는 사람들. 묵묵히 앞만 보고 가는 보우. 의자 위에서 발돋움하며 보우를 보려고 애쓰는 국수가게 주인장. 그 옆에 원현도 서서 보우 쪽을 기웃거린다. 원현: 저분이 뉘신데 이 야단법석입니까 주인장: 보우 선사님도 모르십니까. 행색을 보아하니 그쪽도 스님이신데 이상하다는 듯 흘키는 주인장. 원현: 보우스님 함자는 익히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만 주인장: 보우선사께서 산 속에 들어가신 지가 일 년이 넘었습니다.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고행을 자초하시니 보우선사께서는 생불이나 마찬가지십니다 원현: 스님이 고행하는 게 뭐가 신기하다고 주인장:....... 원현이 못마땅해서 흘키며 혀를 끌끌 차는 주인장. 보우가 온다. 합장 배례하는 사람들. 너무 감격해서 우는 사람도 있다. 보우를 향해 각종 소원을 말하는 사람들. 병 낫게 해달라, 애 낳게 해달라, 돈벌게 해달라 등등. 느닷없이 사람들을 헤치고 나와 보우 앞에 넙죽 엎드리는 신돈. 신돈: 스님 멈추는 보우. 신돈: 소생은 옥천사 사비의 아들로 태어나 지금은 개태사 큰스님 밑에서 불도를 닦고 있는 편조라고 합니다. 어찌하면 저 같은 미천한 천승이 세상을 구할 수 있겠나이까 보우:.....(가만히 보일 듯 말 듯 찡그린다) 신돈: 어느 길로 가면 되겠습니까 스님 보우:......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가는 보우. 엎드린 채 보우의 뒤를 향해 다시 엎드리는 신돈. 신돈: 한 가지만 더 물어보겠습니다 스님 부르짖듯 잡는 신돈. 다시 멈추는 보우. 신돈: 산 것이 부첩니까. 죽은 것이 부첩니까 보우:.... 마치 움칠하는 것 같은 보우의 뒷모습. 엎드린 채 눈을 치켜뜨고 보우의 대답을 기다리는 신돈. 보우, 묵묵히 다시 간다. 사람들이 따라가며 각종 소원을 늘어놓는다. 사람들에게 치이면서도 엎드린 채 꼼짝 않는 신돈. 이윽고 보우를 따라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사람들. 신돈만이 엎드려 있다. 그런 신돈을 놀란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원현. 신돈:....... 옷을 툭툭 털고 일어나는 신돈. 원현과 눈이 마주친다. 여전히 놀라서 눈을 깜빡이는 원현. 싱긋 웃는 신돈. #광화문. 앞 보우가 온다. 대문이 열리고 군졸들이 달려 나와 사람들을 막고 보우를 안으로 모셔간다. #남대가의 국수집 원현이 먹다 남긴 국수마저 후르르 마시듯 먹고 있는 신돈. 원현: 사형은 그럼 보우 선사님을 만나보려고 개경에 올라온 겁니까 신돈: 개경 구경도 할 겸 겸사겸사 원현: 헌데 보우스님께 뭘 물어본 겁니까 신돈:(먹으며) 세상을 구할 길이 있느냐고 물어봤지. 일년 내내 동굴 속에 처박혀 도를 닦다 내려 왔다니 세상 이치를 웬만큼은 깨우쳤을 게 아니냐 원현: 사형도 참 신돈: 잘 먹었다 짐짓 배를 두드리는 신돈. 원현:(배에 찬 전대를 풀며) 부처님도 못 구한 세상을 보우스님인들 무슨 재주로 구하겠습니까 사형도 참. 보우스님한테 싱겁고 난처한 질문을 하셨소 갑자기 당황하며 전대를 마저 풀어본다. 비었다 온 몸을 만져보는 원현. 새파랗게 질린다. 신돈: 왜 원현: 이런 귀신이 곡할 일이 있나. 종이를 사고 남은 돈을 분명히 여기다 넣어뒀는데 신돈:.... 퍼뜩 스치고 지나가는. - 땅바닥에 흩어진 물건을 줍고 있는 원현과 짐짓 부딪히던 장정 - #남대가의 거리 인파를 뚫고 성큼 성큼 오는 신돈. 물건을 잔뜩 들고 부지런히 그 뒤를 쫓아오는 원현. 원현: 그까짓 돈은 잊어버리세요 편조스님. 큰스님한텐 꾸중 한번 들으면 될 일을 가지고 #선경전의 안 용상 앞에 반듯이 앉아있는 보우. 보우:........ 가만히 용상을 바라본다. 병약해보이는 어린 충목왕(11세)이 용상에 앉아있다. 기침을 콜록인다. 용상 아래 왼쪽에 서있던 덕녕공주가 최만생에게 가만히 눈짓한다. 스르륵 용상으로 올라가 수건을 꺼내 충목왕의 입가를 닦아준다. 그 수건에 묻어나는 피. 오른쪽에 시립해 있던 희비윤씨가 입가에 보일 듯 말듯한 미소를 띠더니 곁에 서있던 경창부원군(충정왕)의 손을 꼭 쥐어준다. 다시 기침을 콜록이는 충목왕.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최만생.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보우. 뒤쪽에 서있던 이제현이 보우의 귀에 속삭인다. 이제현: 전하께옵서 자주 객혈을 하십니다 보우:..... 계속 기침을 해대는 충목왕. 보다못한 덕녕공주가 용상으로 올라가 충목왕을 안아 수건으로 입을 가려준다. 힘없이 어머니 품에 몸을 기대는 충목왕. 보우:..... 여전히 바라만 보고 있는 보우. 기철이 나선다. 기철: 하다못해 염불이라도 외워야 할 게 아닌가. 전하께서 몹시 괴로워하고 계시거늘 보우:(비로소 나직이) 나무관세음보살 기철:...... 못마땅해서 혀를 끌끌 차더니 구석에 모여 눈치만 보고 있는 라마승들에게 눈짓한다. 라마승들이 마니통을 돌리며 용상 주위를 빙빙 돌며 염불을 웅얼거린다. #선경전의 뜰 장막과 무대를 세우는 등 각종 공연주비가 한창이다. 여기저기서 연습이 한참인 공연자들의 모습. 흥겨운 모습이다. #선경전의 안 점점 빠르게 용상의 주위를 원을 그리며 돌고 있는 라마승들. 만족해서 웃고 있는 기철. 보우를 바라보는 이제현. 지그시 눈을 감고 앉아 미동도 않는 보우. 실망의 빛이 감도는 이제현. 용상을 본다. 기진해서 덕녕공주의 품에 안긴 충목왕. 그 얼굴의 땀을 닦아주고 있는 덕녕공주. 라마승들이 이윽고 징을 쳐대며 향을 피우고 요란하게 마니통을 돌리고 있다. #남대가의 뒷골목. 주점 마당 버티고 선 신돈. 불안한 원현. 장정:(술잔 던지며) 이 양반이. 누굴 도둑으로 모는 거야 신돈: 그 돈은 부처님께 공양을 올릴 물건을 살 돈입니다. 그러니 그만 돌려주시지요 장정: 그럼 시주를 해달라고 애걸복걸을 할 일이지 훔친 돈을 내놓으라니 (장정들에게) 여보게들. 스님들 사정이 딱해뵈니 몇 푼씩 적선하세 와아 웃으며 엽전 몇 개씩을 꺼내 신돈 앞에 던진다. 꼼짝 않는 신돈. 장정: 괜한 봉변당하고 싶지 않으면 딴 데 가서 부지런히 탁발이나 하시오 스님 놀리듯 웃고 돌아서는 장정. 신돈이 바랑을 벗어 옆에 내려놓고 소매를 걷어부친다. 장정2: 한번 붙어보자는 건가. 옷소매를 걷어붙이면 어쩌겠다는 거야 신돈:(하늘에 대고) 부처님. 용서하십시오. 힘 한번 써야겠습니다. 나무관세음보살 장난스럽게 하늘에 대고 합장하는 신돈. 성큼 장정들에게 다가간다. 원현: 참으세요 편조스님. 돈 몇 푼 때문에 사람이 다쳐서야 되겠습니까 애원하는 원현. 신돈을 둘러싸는 장정들. 순간 신돈이 몸을 날리는가 싶더니 장정들이 우수수 날아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떨어진다. 눈을 꼭 감아버리는 원현. 그 얼굴에 서로 치고 박는 소리와 장정들의 신음소리. 눈을 뜨는 원현. 어디서 달려왔는지 십여 명의 장정들이 몽둥이를 들고 신돈을 공격하고 있다. 신돈이 허공을 날며 장정들을 가격한다. 우르르 나뒹구는 장정들. 사뿐히 땅위에 내려앉는 신돈. 활짝 웃고 있다. <신돈 1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