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돈 29회 <신돈> -29회 - #곤성전의 안 공민왕:...... 신돈을 본다. 신돈:.... 미소. 공민왕:...... 노국공주를 본다. 노국공주:..... 역시 미소. 공민왕: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내가 좋은 말로 덕성부원군을 대궐로 불러들인 다음 노국공주: 전하께서 아무리 좋은 말로 부르셔도 기철과 부원배들은 대궐로 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 공민왕: 정 안 들어오면 내가 저들을 모두 잡아들일 겁니다 신돈: 단숨에 부원배를 죽이지 못하시면 전하, 전하께서는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이시게 될 것입니다 공민왕:(웃으며) 기철에게는 왕명을 거역할 명분이 없질 않느냐 신돈: 명분은 승자의 몫일뿐 패자의 몫은 아니옵니다 공민왕:..... 신돈: 전하께서 군사를 보내 기철과 부원배들을 잡아 죽이려고 하시면 저들은 목숨을 걸고 전하께 대항할 것이옵니다. 죽음이 목전에 있는데 저들이 명분을 따지겠습니까 공민왕:(신음) 신돈: 전하. 저들의 방비가 전하와 못지 않을 것이니 전하께서 성공하신다는 보장이 없사옵니다. 필경 내전과 다름없는 혈전이 벌어질 것이옵니다. 싸움이 하루 아침에 끝나지 않고 시일을 끌게 되면 전하와 기철 사이에서 눈치를 보고 있는 무리들이 동요를 하게 될 것이옵니다 공민왕: 기철과 내 눈치를 보고 있는 무리들이 있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신돈: 전하께서는 전하의 신하들을 모두 믿고 계시옵니까 공민왕:...... 신돈: 고려는 팔십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원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 동안 고려에 임금다운 임금이 한 분이라도 있었사옵니까. 원의 눈치를 보며 용상을 지키기에 급급하지 않았사옵니까. 하오니 조정 대신들은 임금의 눈치보다는 원의 눈치를 먼저 살폈습니다 공민왕: 내가 이번 기회에 그런 자들을 모두 한꺼번에 쓸어버릴 것이야 신돈:.... 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내민다. 공민왕:..... 바라보더니 받아서 펴본다. 관리들의 이름과 직책이 줄줄이 적혀있다. 공민왕: 이것이 무엇이냐 신돈: 조정의 대신부터 지방의 관리까지 모두 거기에 적혀 있사옵니다. 왼쪽에 점을 찍어놓은 인물들은 어떤 식으로든 원과 부원배들과 연줄이 있는 자들이옵나이다 공민왕:..... 자세히 보기 시작한다. 신돈: 그 동안 원과 부원배들의 눈밖에 난 사람들 가운데 관직에 오른 사람이 몇이나 되겠사옵나이까. 그들의 낙점을 받지 않고 관직에 오른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옵나이다. 이들이 지금 전하와 기철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사옵니다. 싸움이 전하께 유리하게 돌아가면 저들은 원과 부원배들을 욕하며 전하의 편에 설 것이옵니다. 허나 전하께서 단숨에 기철을 죽이지 못하시고 부원배들의 저항이 거세지면 저들은 하루 아침에 전하께 등을 돌릴 것이옵니다 공민왕:.....(힘없이 두루마리를 내려놓으며) 내가 믿을 사람이 이렇게 없단 말이냐 신돈: 백성들은 전하께서 배불리 먹이시면 전하를 따를 것이옵니다. 어찌 백성들이 전하와 권력을 나누고자 하겠나이까. 하오나 권문세도가와 권문세도가에 연줄을 대서 출세한 자들은 전하와 권력을 나누고자 할 것이옵니다. 그러니 저들이 바라는 것은 고려의 독립이 아니옵니다. 저들이 비분강개하는 것은 원에 당하는 치욕이 아니라 저들이 나눠가진 권력을 잃게 될까,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이옵니다 공민왕:....... 괴로운. 신돈: 전하. 전하께서는 이번 싸움에서 반드시 승리하셔야 하옵니다. 전하께서 실패하시면 전하의 왕관만을 잃는 것이 아니옵니다. 팔십 여년을 개돼지 취급을 받으며 살아온 억조창생을 생각하시옵소서 공민왕:....... 눈물이 주르륵. 노국공주:..... 치미는 눈물을 삼키며 공민왕을 바라보는 노국공주. 공민왕:(눈물을 삼키더니) 위왕의 장례를 치루라 했느냐 신돈:...... 공민왕: 중전께서 부친을 잃었으니 문상을 오라? 신돈: 한가지 하실 일이 더 있사옵니다 전하 공민왕: 무엇이냐 신돈: 기철과 부원배들을 죽이시는 것 못지 않게 더 시급한 일이옵니다 공민왕: 말을 하거라 신돈: 군사를 보내 쌍성총관부를 치시옵소서 공민왕:..... 신돈: 쌍성총관부는 본래 고려의 땅이 아니었나이까. 다른 한편으로 군사를 나누어 압록강 유역의 파사부를 치시옵소서. 압록강을 건너와 고려를 감시하는 원의 군사들을 모두 압록강 너머로 쫓아내셔야 하옵나이다 공민왕: 고려의 옛 땅을 모두 되찾으란 말이지 신돈: 그것이 전하의 명분이옵나이다 공민왕: 그 일을 함께 하라 신돈: 예, 전하 공민왕: 하고말고. 내가 그렇게 할 것이야 부르르 떠는 공민왕. 노국공주를 본다. 노국공주:..... 기쁨의 눈물이. #선경전의 안 최만생, 이환관 등이 용상 우측에 빈소를 차리고 있다. 이제현:(들어오더니) 뭘 하고 있는 겐가 최만생: 선경전에 빈소를 차리라는 어명이십니다 이제현: 빈소라니 최만생: 중전마마의 생부이신 위왕 전하의 장례식을 치르실 모양입니다 (환관들에게) 서둘러라 분주하게 움직이는 환관들. 이제현:...... #강안전의 안 공민왕:(웃으며) 중전께선 말리시는데 그렇다고 그냥 모른척하고 넘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현: 하오면 국상을 선포하실 겁니까 공민왕: 그냥 조문만 받기로 했습니다 이제현: 하오면 상복은 어찌 입을 건지 공민왕: 번거롭게 하실 것 없습니다. 그저 빈소에 향이나 올리세요. 중전께서 더는 바라지 않으십니다 #곤성전의 안 허리 굽혀 인사 올리는 박불화. 노국공주: 고맙습니다. 덕분에 내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게 됐습니다 박불화: 그리 생각을 해주시니 황후폐하께서도 매우 기뻐하실 것이옵니다 노국공주: 그래요 박불화: 마마. 덕성부원군은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황후폐하께서 덕성부원군에게 더는 분란을 일으키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를 하셨사옵니다. 그러니 노국공주: 내가 경황이 없어 자정원사를 오래 잡아두지 못합니다 가만히 고개 돌려버리는 노국공주. 박불화:(싱긋 웃고) 소인 그만 물러가겠사옵니다 뒷걸음질 치는 박불화. #동. 복도 방문이 열리고 나오는 박불화. 힐끔 안을 본다. 여전히 고개 돌리고 있는 노국공주. 박불화:..... 싱긋 웃는데 방문이 닫힌다. #동. 안 노국공주:.... 김상궁: 편히 앉으시옵소서 마마 노국공주: 내 아버지를 죽여놓고 내 앞에서 웃고 있질 않느냐 김상궁: 몸 안에 노기가 차면 태아에게 해롭사옵나이다 노국공주:.... 문득 배를 어루만지는 노국공주. 김상궁: 황공하옵나이다 마마 노국공주:.....(한숨) 김상궁: 어째서 한숨을 쉬시옵니까 마마 노국공주: 이 아이가 축복을 받겠느냐 김상궁: 무슨 말씀이시온지 노국공주: 이 아이에겐 몽골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 배를 어루만지며 가만히 고개 돌리는 노국공주. 김상궁:.... 아프다. #대궐의 길 덕녕공주가 온다. 허리굽히는 박불화. 덕녕공주: 돌아가시는가 박불화: 예, 마마 덕녕공주: 쓸데 없는 일을 하셨네 박불화: 무슨 말씀이신지 덕녕공주: 위왕의 유골을 가져온다고 마음이 풀어지겠는가 박불화:(웃으며) 보탑실리 공주께서는 이제는 더 이상 원의 공주가 아니십니다 덕녕공주: 자네가 고려인이 아니듯이 박불화:(흠칫) 덕녕공주: 황후폐하께 전하시게. 더는 고려의 내정에 간섭마시고 원나라 걱정이나 하시라고. 원이 망하면 내가 돌아갈 곳이 없질 않은가 #기철의 집. 앞 들어오는 박불화. 여기저기서 먹고 마시는 사병들. 또 한번 찡그리는 박불화. 기륜이 달려온다. 기륜: 연경에 돌아가시거든 황후폐하께 안심하시라고 전해주십시오. 고려왕 쯤은 우리 힘으로 넉넉히 막을 수가 있다구요 웃어대는 기륜. #동. 사랑방 안 박불화: 그만 허리를 굽히시지요 기철: 내가 왜. 내가 무서울 게 뭐 있다구 박불화: 겨우 고려왕을 달래놨는데 이러시면 기철: 황후폐하께서 자꾸 고려왕을 달래니까 그 놈이 더 기가 나서 펄펄 뛰는 걸세. 힘에는 힘으로 맞서야지 박불화: 황후폐하께서 혈육들을 버리시겠습니까. 태자전하께서 황제가 되시면 적절한 조치가 있을 겁니다. 덕흥군을 고려의 새왕으로 삼든지 아니면 아예 덕성부원군 대감을 보위에 앉히시든지 기철: 그 전에 내가 죽게 생겼는데 무슨 소리야 박불화: 덕성부원군대감 기철: 내 목숨은 내가 지킬 것이니 상관 마시게 손 내젓는 기철. 박불화: 대궐에서 위왕의 장례를 치른다고 합니다. 좋은 기회가 아니옵니까 기철: 좋은 기회라니 박불화: 문상을 드린다는 핑계로 입궐을 하셔서 고려왕과 화해를 하시지요 기철: 아 내가 언제 저하고 싸우자고 했나. 그 놈이 날 자꾸 죽이려고 하는 거지 #영수전의 뜰 승복을 입은 원현이 신기해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다. 고개를 숙이고 오가는 궁녀들. 원현:(지효의 허리를 쿡쿡 찌르며) 대궐의 궁녀들은 모두 양귀비 못지 않다고 하더니 그 말이 사실입니다. 나는 눈이 부셔서 눈을 못 뜰 지경입니다 지효:(그저 빙긋) 원현: 지효스님은 좋으시겠습니다. 보우왕사님을 따라 대궐 출입을 자주 하시니 지효: 원현스님도 편조거사님을 따라 다니시면 될 것이 아닙니까 원현: 편조거사님은 틀렸습니다. 저만 보면 개태사로 내려가 있으라고 핀잔을 주시니 지효: 원현스님은 속세에 미련이 많으신가 봅니다 원현:(웃으며) 저야 중이 되고 싶어서 됐나요. 오갈 데 없는 나를 편조 거사님이 거둬주시는 바람에 중이 된 거지요 어슬렁거리며 전각 구경을 하는 원현. 그런 원현을 웃으며 바라보는 지효. 원현: 중국 가는 배를 타고 가다 풍랑을 만났던 일을 기억하시지요. 그때 편조거사님이 목탁을 내던지고 사공들과 돛을 잡았지요 지효:..... 원현: 풍랑이 몰아치고 있는데 염불이나 외우고 앉아있는 스님이라니. 덕분에 배가 뒤집혀서 다 죽을뻔하지 않았습니까 숨 크게 내쉬며 전각의 지붕을 본다. 전각의 지붕들. 원현: 사내대장부로 태어났으면 큰 일을 하다 죽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웃으며 대궐을 계속 둘러보는 원현. #동. 안 명덕태후: 그냥 장례를 치르겠다는 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보우: 글쎄올습니다 명덕태후: 문상이나 받고 말겠다니. 원 그런 해괴망칙한 장례가 어딨습니까 보우: 불교에서는 장례식을 다비식이라고 하옵니다 마마 명덕태후:....... 보우: 다비란 불에 태운다는 뜻이니 이미 화장해서 골분이 되어 온 위왕의 장례식을 치른다는 것 또한 어폐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중전마마께서 문상만 받으시겠다는 것도 틀린 것은 아닐 것입니다 명덕태후: 하긴 중전의 생부가 원나라 사람이니 고려왕실에서 장례를 치러주는 것도 보기 좋은 모양새는 아니겠습니다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 웃는 명덕태후. #선경전의 안 안도치와 최만생이 빈소를 지키고 있다. 위왕의 위패. 향을 올리는 정세운. 지켜보고 있는 이제현과 염제신. 절하고 물러가는 정세운. 김용이 향을 올린다. 염제신:(이제현에게 속삭이듯) 우정승대감. 명색이 중전께서 상을 당하셨는데 예식도 없고 곡도 없으니 너무 빈약한 것이 아닙니까 이제현: 그렇게 하자고 하시니 절하고 일어나던 김용이 꼬꾸라지듯 엎드리며 울음을 터뜨린다. 김용: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닌가. 만리타국에 시집 온 중전마마께서 부친을 여의고 이제야 문상을 받으시니 참으로 가엾고 애석한 일이 아니냐 울음을 그치고 곡을 하는 김용. 김용: 아이고. 아이고....... 찡그리는 정세운. 염제신:(이제현에게) 정말 슬프게 웁니다 킥킥 웃는 염제신. #강안전의 안 이인복:..... 힐끔 신돈을 본다. 신돈:..... 고개를 숙이고 앉은. 이인복:(신음) 황공하오나 전하, 이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이 누구 누구이옵나이까 공민왕: 경과 나 그리고 편조 뿐이오 이인복:(또 한번 신음) 공민왕: 대궐의 일은 경에게 맡기고 대궐 밖의 일은 편조에게 맡길 생각이오 이인복: 대궐 밖의 일이라 하오시면 신돈: 원이 왜국을 친다는 명분으로 만든 정동행성은 기철의 아성이나 같은 기관입니다. 만일 기철이 변을 당했다는 소식이 밖으로 새어나가면 정동행성의 군사들이 제일 먼저 반기를 들 것입니다. 그런즉 기철이 입궐을 하면 이인복: 그런 일은 염려마시게. 기철과 부원배들을 죽이고 나면 이문소에 군사들을 보내 신돈: 응양군과 용호군의 지휘관 중에는 기철을 따르는 자들이 많이 섞여 있습니다. 만에 하나 정동행성 이문소에 진압하러 나갔던 군사들이 저들과 합세라도 하게 되면 이인복: 이번 일에 백성들까지 동원하는 건 나는 반댈세 신돈:..... 이인복: 전하. 훗날을 생각하셔아 하옵니다 공민왕: 훗날을 생각하다니오 이인복: 부원배들을 처단하고 나면 백성들 가운데 폭도로 변해 부원배들의 재산을 약탈하는 무리들이 생길 것이옵니다. 저들이 공을 세우면 그걸 막을 명분이 없사옵니다 신돈:(웃으며) 그 정도 한풀이야 눈을 감아주셔야지요 이인복:(버럭) 한이라니. 무슨 한을 말씀하시는 건가 신돈: 한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리시면 화풀이라고 해두지요 이인복:(신음) 공민왕: 지금은 다툴 때가 아니외다. 힘을 합해야지요 이인복:.....(신돈을 흘키더니 한숨) 공민왕: 나는 성산군만 믿겠습니다 #동. 뜰 나오는 신돈과 이인복. 이인복: 자네는 권력의 속성을 모르시는가 신돈:..... 이인복: 나눌 수가 없는 것이야, 권력이라는 것은 가버리는 이인복. 신돈:...... 빙긋 웃고 서있는. #기철의 사랑방 안 권겸: 좋은 기회가 아니옵니까 덕성부원군대감. 고려왕과 화해를 하신 마당에 문상을 가는 것이 예의가 아니겠습니까 노책: 예, 잘 됐습니다 웃으며 끄덕이는 부원배들. 기철: 화해를 하다니. 누가 화해를 했다는 것이야 권겸: 황후폐하께서 박불화를 보내 두 분 사이에 다리를 놓으신 게 아닙니까 (웃으며 부원배들에게) 안 그렇습니까. 막말로 내전이라도 일어났다면 우리만 개죽음을 당할 뻔했잖습니까 노책: 예, 십년 감수했습니다 웃고 떠드는 부원배들. 기철: 으음 (못마땅) 권겸: 대감께서 앞장을 서세요. 조문을 가셔서 눈물도 좀 흘리시고 부의금도 듬뿍 내시고 그러면 그 표독스런 중전도 안색이 환하지겠지요 기철: 그랬다가 그 놈들이 장사패들을 매복시켜 놨으면 어쩌려고 권겸: 중전이 상을 당했는데 문상 온 사람들한테 칼부림이야 하겠습니까 노책: 예. 대감께서 들어가셔야 합니다 권겸: 생각을 해보십시오. 대감께서 문상을 안 가면 백성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천하의 덕성부원군께서 중전이 무서워 문상도 못 갔다고 뒤에서 수군댈 것이 아닙니까 (부원배들에게) 안 그런가 이 사람들 옳다고 맞장구들을 친다. 기철: 좋소이다. 들어갑시다 권겸: 잘 생각하셨습니다. 우리가 백성들의 웃음 거리가 될 수는 없지요 왁자지껄 호기를 부리는 부원배들. #동. 안방 기철: 어머니. 그 동안 마음 고생이 많으셨지요. 제가 어머니 마음 고생을 덜어드리고 연경에서 노심초사 우리 기씨 일가의 안위만을 걱정하고 있는 누이동생을 위해 허리를 굽히기로 했습니다 기철모: 그래 잘했다. 이번엔 니가 양보를 해라. 그래도 정 안 되면 그땐 황후폐하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기철: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어머니 (일어나더니) 초상집을 갈 때마다 느끼는 겁니다만 어머니, 오래 오래 사셔야 합니다 기철모: 염려마라. 난 백 살은 살 거니까 #동. 대문. 앞 기륜이 사병들에게 훈시를 하고 있다. 기륜: 대궐로 들어가거든 부원군대감을 에워싸고 잠시도 한눈을 팔아선 안 된다. 만에 하나 매복한 장사패가 있거나 수상한 움직임이 눈에 띄면 그 즉시 칼을 빼들고 닥치는 대로 죽여 버려야 할 것이야. 알겠느냐 사병들의 우렁찬 대답. #동. 마당 안에서 나오는 기철. 권겸이 혼자 서있다. 기철: 다들 어딜 갔소이까 권겸: 집에들 다녀오겠다고 먼저 나갔습니다 기철: 집에 다녀오다니. 다 같이 대궐로 들어가기로 해놓고선 권겸:(웃으며) 뻔하지 않습니까. 대감께서 무사히 다녀오시는 걸 보고 나서 대궐로 들어가겠다는 게 아니겠습니까 기철:(혀를 차며) 꽁무니들을 빼기는 권겸: 가시지요. 나는 무서울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앞장 서는 권겸. #초선의 집. 앞 달려오는 공철. 안으로 들어간다. #동. 마당 공철:(달려들어와) 마님. 부원배들이 대궐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초선:(안에서) 알았다 #동. 안방 초선: 큰 공을 세우셨습니다 신돈: 우리 쪽 사람들도 여럿 다칠 겁니다 초선: 대가를 얻어내려면 그만한 피는 흘려야지요 싱긋 웃는 초선. #동. 박서방의 방 안 바짓가랭이를 질끈 동여매는 박서방. 박의처: 너무 앞장 서지 마세요. 그러다 다치기라도 하시면 박서방: 오늘처럼 죽기 좋은 날이 어딨겠소 벌떡 일어나 나간다. 걱정돼서 바라보는 박의처. #동. 안방 초선: 내 평생에 이런 날을 못보고 죽을 줄 알았습니다 신돈: 이제야 전하를 믿으십니까 초선: 예. 믿고 말고요 환하게 웃는 초선. #동. 별채 마당 각종 무기들을 움켜쥔 장정들. 박서방: 어느 임금이 우릴 사람 취급을 해줬느냐. 국왕 전하께서 우리보고 죽으라고 하시니 살기를 바래서는 안 될 것이야 장정들을 노려보는 박서방. 입을 꽉 다물고 눈을 부릅 뜬 장정들. #대궐의 문. 앞 채여를 탄 기철과 말을 탄 권겸과 기륜이 사병들에게 둘러싸여 온다. 대궐 문 앞에 김첨수가 한가롭게 서있다. 김첨수: 어딜 가시는 게요 기륜:(앞으로 나서며) 보면 모르느냐. 덕성부원군 대감께서 문상을 오셨다 김첨수:(채여로 간다) 기철: 으흠 김첨수: 송구하오나 내일 다시 오시지요 기철: 내일 다시 오라니 김첨수: 오늘은 더 이상 문상객을 받지 않으시겠답니다 기철: 으음 권겸: 덕성부원군께서 두 번 행차를 하셔야 되겠느냐. 어서 궐문을 열거라 김첨수:(입맛 다시더니) 그럼 좋을 대로 하시지요. 망루에 대고 문을 열라는 손짓을 하는 김첨수. 궐문이 열린다. 기철: 가마를 내려라 채여를 내려놓는 가마꾼들. 김첨수: 그냥 타고 들어가시지요 기철:(힐끔 본다) 김첨수: 덕성부원군대감을 걸어서 들어가시게 할 수는 없지요 기철: 고맙구만 채여를 올리라는 손짓을 하는 기철. 채여를 들어 올리는 가마꾼들. 궐문으로 간다. 따르는 사병들. 김첨수:(막으며) 너희들은 여기서 기다리거라 기륜: 물러서지 못할까 김첨수: 무장하고 빈소에 들어갈 수는 없소이다 기륜: 물러서래도 그런다 기철: 기륜아 기륜:(말을 몰아 채여로 가며) 예, 형님 기철: 너는 여기서 기다리거라 기륜: 호위 없이 대궐로 들어가시는 건 위험합니다 기철: 채여를 타고 대궐로 들어가보는게 얼마만이냐. 전하께서 나를 이만큼 대접해주시는데 사소한 일로 트집을 잡아서야 되겠느냐 권겸:(웃으며) 옳으신 말씀입니다. 전하의 성의를 무시해서야 안 돼지요. 들어가십시다 말을 몰아 앞서는 권겸. 기철: 으음. 가자 채여를 독촉하는 기철. 채여, 궐문 안으로 들어간다. 기륜:..... 불안해서 바라보는 기륜. 궐문이 닫힌다. #선경전의 문. 밖 기철의 채여와 권겸이 온다. 문 앞에 버티고 선 최영. 흠칫하는 기철. 최영: 여기서부턴 걸어서 들어가시지요. 전하께서 선경전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철: 전하께서 날 기다리고 계시단 말이냐 최영: 예, 덕성부원군대감 기철: 으음 (씰룩이더니) 내려라 채여를 내리는 가마꾼들. 채여에서 내리는 기철. 권겸도 말에서 내린다. 최영: 문을 열어라 선경전 문이 열린다. 기철이 거드름을 피우며 안으로 들어간다. 권겸, 뒤따라 들어가는데 그 앞을 막아서는 최영. 흠칫하는 권겸. #동. 선경전의 뜰 안으로 들어서는 기철. 선경전 문이 닫힌다. 흠칫 돌아보는 기철. 이인복:(소리) 어서 오시지요 덕성부원군대감 기철:..... 놀래서 바라본다. 이인복이 옆에 서있다. 이인복: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철:.... 선경전을 본다. 높이 솟구친 전각. 기철:(신음) 이인복: 전하를 뵙기가 두려우십니까 덕성부원군대감 기철: 내가 전하를 두려워했으면 대궐로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야 이인복: 그러니 어서 안으로 드시라는 겁니다 기철: 못 들어갈 것도 없지 성큼 선경전으로 향해 가는 기철. 그러다 문득 멈춘다. 목이 탄다. 뒤돌아본다. 웃고 서있는 이인복. 기철: 으흠 부르르 떨더니 다시 선경전을 향해 가는 기철. #내불당의 안 위왕의 위패. 향이 타오르고 있다. 노국공주:.... 바라보고 앉아있다. 상복을 입었다. #선경전의 뜰 계단을 성큼 성큼 오르고 있는 기철. #내불당의 안 타오르는 향. 노국공주:...... #선경전의 안 안으로 들어서는 기철. 흠칫 멈춘다. 용상에 공민왕이 앉아있다. 부르르 떠는 기철. 공민왕: 그 동안 백성들이 흘린 눈물이 얼마냐. 오늘은 네 피로 대신할 것이야 전각의 기둥 뒤에서 정세운과 김용이 나온다. 공민왕: 죽여라 동시에 칼을 빼드는 정세운과 김용. 기철: 잠깐만. 잠깐만 내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전하 (무릎을 꿇으며) 나 같은 놈을 죽여 뭘 하시겠습니까. 지금 당장 나를 죽이면 속이야 시원하시겠지만 원나라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원의 대군이 몰려와 고려를 짓밟을 것이옵니다 전하 정세운의 칼이 기철을 내려친다. 기철: 어이구 한쪽 팔을 움켜쥐고 나뒹구는 기철. 기철: 살려주십시오 전하. 살려만 주시면 연경에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공민왕:..... 냉정한 눈빛. 기철:(악이 나서) 오냐. 기어코 날 죽여야겠다면 죽여라. 내가 국왕이라면 이런 비열한 방법으로 정적을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중전의 치마폭에 숨어서 임금노릇을 하더니 이번엔 장인의 장사를 지낸다는 핑계를 대사 날 속여? 부끄럽지도 않으냐 이놈 김용: 이놈이 김용이 칼을 쳐든다. 기철: 이 사람 김용, 나 좀 살려주게. 내가 자네 부탁이라면 다 들어주지 않았나 당황해서 더 힘껏 칼을 내려치는 김용. 가슴을 움켜쥐는 기철. 기철: 아이구 나 죽는다 문쪽으로 기어가는 기철. 바라보는 공민왕의 차거운 눈빛. 문밖으로 기어나가는 기철. 정세운의 칼이 등을 내려친다. 나뒹구는 기철. 기철:(손을 내저으며) 제발 살려주십시오 전하. 재산이고 뭐고 다 내놓겠습니다 정세운의 칼과 김용의 칼이 거의 동시에 기철을 내리친다. #동. 뜰 선경전 문턱을 기어서 밖으로 나오는 기철. 목을 움켜쥐고 피를 토한다. 기철: 이놈. 네 놈이 얼마나 더 그 자리에 앉아있나 보자. 내가 저승에 가서라도 네 놈이 망하는 꼴을 보고야 말겠다 분해서 부들부들 떨던 기철, 꾸역꾸역 피를 토하기 시작한다. #내불당. 안 향. 노국공주:...... 갑자기 허리를 꺾으며 두 손으로 배를 움켜쥐는 노국공주. #선경전의 뜰 목을 움켜쥐고 두 눈을 부릅뜬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기철. 그런 기철을 내려다보는 정세운과 김용. #동. 안 공민왕:....내가 너를 죽일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 비열한 짓이라도 할 것이다. 오히려 피눈물이 흐른다. #선경전의 문. 밖 대문이 열린다. 이인복:(나오며) 저 놈을 죽여라 최영이 칼을 빼든다. 놀래서 뒤로 자빠지는 권겸. 최영이 다가온다. 도망치는 권겸. 최영이 칼을 내려친다. 한쪽 팔을 움켜쥐고 쓰러지는 권겸. 다가서는 최영. 권겸, 비틀거리며 도망친다. #대궐의 문. 안 도망쳐오는 권겸. 뒤쫓아오는 최영. 대궐문을 열려고 버둥거리는 권겸. 겨우 대궐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최영의 칼이 권겸을 내려친다. #동. 궐문. 앞 등에 칼을 맞은 권겸이 앞으로 꼬꾸라진다. 기륜: 복안부원군대감 칼을 빼들고 달려간다. 뒤쫓는 사병들.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응양군들. 칼싸움이 벌어진다. #정동행성의 앞 와아 함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장정들. 박서방이 앞장을 섰다. 안에서 쏟아져나오는 원나라의 군인들. 그러나 도망치기에 바쁘다. #노책의 집. 앞 수레에 짐을 싣고 있는 노책과 노비들. 멀리서 함성. 노책: 뭘 꾸물대고 있느냐. 어서 싣지 않고 노비: 대감마님. 짐을 버리고 몸부터 피하시지요 노책: 이걸 다 놔두고 도망치란 말이냐. 죽는 한이 있어도 안 된다. 어서 싣지 못하겠느냐 악쓰는 노책. 부지런히 짐을 싣는 노비들. 함성을 지르며 달려오는 백성들. 도망치는 노비들. 백성들이 수레에 실은 짐을 뺏어가기 시작한다. 노책: 이놈들. 어디다 손을 대느냐. 이 날강도 같은 놈들 백성1: 날강도라니. 이 놈이 우리보고 날강도라고 하오 와아 웃음이 터지는 백성들. 노책: 남의 물건을 훔쳐가는게 날강도가 아니고 뭐냐 이놈들 백성1: 이보시오 경양부원군대감. 이게 어째서 대감의 물건이오. 백성들의 고혈이지 노책:(두 손 벌려 수레를 막으며) 못가져간다 이놈들. 차라리 날 죽여라 와아 달려드는 백성들. 노책을 두들겨 패기 시작한다. 그래도 수레를 움켜잡고 놓지 않는 노책. #기철의 집. 앞 피투성이로 쫓겨오는 기륜. 뒤쫓아오는 김첨수와 응양군들. 안에서 기철의 사병들이 달려나온다. 혈투가 벌어진다. #동. 마당 기륜: 어머니. 어서 밖으로 나오세요. 지금 당장 연경으로 도망치셔야 합니다 #동. 안방 기철모:...... 꼼짝 않고 앉아있는 기철모. 기륜:(밖에서) 형님이 함정에 빠져 죽었습니다. 어서 나오세요 어머니 기철모:(버럭) 나보고 길바닥에서 죽으란 말이냐 #동. 대문 앞 혈전이 계속되고 있다. 여기저기서 부원배들의 사병들이 몰려온다. 밀리는 응양군들. 김첨수: 물러서지 마라. 기륜을 잡아죽여야 한다 또 다른 사병들이 달려온다. 점점 밀리는 김첨수의 응양군들. #동. 마당 기륜: 어머니. 고집 부리지 마시고 어서 나오세요 안절부절 못하는 기륜. 청지기가 달려온다. 청지기: 대감마님. 응양군들이 도망치고 있습니다 기륜: 그래? 눈이 번쩍해서 달려나간다. #동. 대문. 앞 달려나오는 기륜. 도망치고 있는 응양군들. 함성을 지르며 뒤쫓는 사병들. 기륜: 대궐로 가자 앞장서는 기륜. 와아 뒤따르는 사병들. --------------------------------------------------- #선경전의 뜰(밤) 공민왕이 전각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최만생을 비롯한 무장한 환관들. 멀리 도성 쪽에서 함성 소리와 함께 불길이 치솟는다. 불안한 공민왕. #곤성전의 복도(밤) 방문이 열려있다. 노국공주:(안에서) 전하께서는 어디 계시느냐 안도치:(굽히고) 선경전에 나가 계시옵니다 노국공주: 아직도 부원배들을 다 잡아들이지 못했다고 하느냐 안도치: 기철과 권겸은 대궐에서 도륙하였으나 남은 부원배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은 모양이옵나이다 노국공주:(신음) #선경전의 뜰(밤) 이인복이 달려온다. 공민왕: 어찌 돌아가고 있느냐 이인복: 황공하옵나이다 전하. 날이 어두워지는 바람에 피아간에 구별이 어려운 지라 혼전이 계속되고 있다고 하옵나이다 공민왕: 우정승께선 어디 계시느냐 이인복: 도당에서 조정대신들과 대책을 논의하고 계시옵니다 공민왕: 대책이라니. 부원배들의 사병들이 내란을 일으키고 있거늘 이인복: 신이 다시 알아보고 오겠나이다 (가려는데) 공민왕: 내 곁에 있으라. 내 곁에 사람이 없으니 답답하질 않으냐 목이 타는 공민왕. 이인복:...... 그런 공민왕을 가만히 바라보는 이인복. 멀리서 다시 치솟는 불길. 공민왕: 저건 어디서 솟구치는 불길이냐 최만생: 자세히는 모르겠사오나 공민왕: 도대체 부원배들의 세력이 이렇게도 컸단 말이냐 이환관이 달려온다. 공민왕: 대호군을 찾았느냐 이환관: 용호군을 이끌고 달려갔다고 하옵나이다 #도성의 거리(밤) 기철의 사병과 응양군, 백성들이 뒤섞여 혈투가 벌어지고 있다. 점점 밀리는 관군쪽. 정세운이 용호군을 이끌고 달려온다. 정세운: 이놈들. 부원배들을 처단하라는 왕명을 거역할 셈이냐.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지 못할까 정세운에게 달려드는 부원배의 사병들. 정세운의 칼일 번쩍인다. #대궐의 문. 앞(밤) 이인복이 달려온다. 최영이 군사를 거느리고 대궐을 지키고 있다. 이인복: 어찌 돌아가고 있는가 최영: 쉽게 진압이 될 것 같지가 않습니다. 아무래도 소장이 나가봐야겠습니다 이인복: 대궐을 지킬 군사가 없질 않은가 최영: 시간을 끌면 부원배들의 기세가 더 오를 것입니다 이인복: 으음 최영: 허락해주십시오 밖에서 함성이 가까워진다. 이인복: 가시게 최영에 말에 오른다. 최영: 궐문을 열라 대궐문을 연다. 바로 앞에까지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최영: 날 따르라 최영이 군사를 이끌고 밖으로 달려나간다. 급히 궐문을 다시 닫는다. 이인복: 으음 신음하는 이인복. #도첨의사사의 회의실. 뜰(밤) 도성의 치솟는 불길을 바라보고 있는 이제현. 불길을 보고 불안해서 수군거리는 대신들. 염제신: 우정승대감.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습니다 이제현: 으음 염제현: 아무래도 전하를 피신시켜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현: 한 줌도 안 되는 부원배들 때문에 전하께서 그런 망신을 당할 수는 없지요 염제신: 전하께서도 참 딱하시지. 어쩌자고 우리와는 상의 한마디 없이 일을 벌이시나. 어허 안절부절 못하는 염제신. #대궐의 길(밤) 이인복, 온다. 멈춘다. 이인복:...... 전각 밑 어둠 속에서 떨고 있는 사람의 신음소리. 이인복: 누구냐 대꾸 없다. 품에서 칼을 빼드는 이인복. 김용: 나, 나요 김용이 어둠 속에서 얼굴을 내민다. 이인복: 안성군이 아니오 김용:(가뿐 숨) 이인복: 난리가 터졌는데 거기서 뭘 하고 계시는 거요 김용: 쳇기가 있는지 자꾸 구토가 치미는 바람에 돌아서 토하는 시늉하는 김용. 이인복:..... 한심해서 흘키고 가는 이인복. 김용: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시오. 구토가 멎는대로..... 대꾸없이 가버리는 이인복. 가까이서 함성. 기겁을 해서 전각의 어둠 속으로 숨는 김용. #대궐의 문. 앞(밤) 달려오는 부원배들의 사병을 결사적으로 막고 있는 최영. 최영: 물러서지 마라. 대궐 안으로 한놈도 들여선 안 된다 칼을 휘드르며 앞으로 나가는 최영. #선경전의 뜰(밤) 이인복, 온다. 공민왕:(전각 위에서) 편조를 찾아오너라. 지금 당장 편조를 찾아오라고 하질 않느냐 환관들이 이리저리 달려간다. 이인복:...... 멀리서 공민왕의 그 모양을 지켜보고 서있는 이인복. #법왕사의 누각 위(밤) 도성을 바라보고 서있는 큰스님. 뒤에서 싱긋 웃고 있는 신돈. 도성에서 들려오는 함성 소리에 안절부절 못하는 덕운. 원현: 저것 좀 보세요 지효스님. 부원배놈들 집에 또 불을 지른 모양입니다 지효:...... 멀리 불길이 치솟는다. 원현: 잘 탄다. 기둥 뿌리까지 다 타버려라 지효:(웃으며) 그렇게 신이 나십니까 원현: 세상이 뒤집히는데 그럼 신이 안 나겠습니까 지효:(웃으며) 하긴 나도 흥분이 됩니다 원현: 지효스님도 그렇습니까 지효: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게 불구경이라고 하질 않습니까 원현:(큰스님에게 달려가서) 스님 보내주십시오. 불쌍한 중생들이 부원배들한테 죽어가고 있는데 구경만 하고 있을 순 없잖습니까 큰스님:.... 도성만 바라보고 서있다. 원현: 스님 신돈:(웃으며) 보내주시지요 스님 큰스님:..... 혀를 차더니 돌아선다. 덕운: 어딜 가시려구요 스님 큰스님: 짐 싸서 개태사로 내려가자 덕운: 아니 이 밤중에 그것도 저 난리를 뚫고 길을 떠나시겠다는 겁니까 울상이 돼서 큰스님을 따라가는 덕운. 신돈:..... 원현을 보고 싱긋 웃더니 큰스님을 따라간다. 원현, 신이 나서 밖으로 도망친다. 그러다 돌아서 지효를 손짓한다. 원현: 같이 갑시다 지효스님 지효:...... 원현: 지효스님은 세상이 뒤집히고 있는데 보우왕사님처럼 염불만 외우고 있을 겁니까 지효:..... 원현: 지효스님 지효:...... 법당을 바라본다. #동. 법당 안(밤) 염불 외우고 있는 보우. #동. 누각(밤) 지효:....... 원현: 지효스님 (가자고 손짓한다) 지효:.... 달려가는 원현. 지효, 따라간다. #도성의 길(밤) 달려오는 원현. 멈춘다. 몽둥이를 들고 달려가고 있는 백성들. 부원배들의 노비들과 마주친다. 와아 함성을 지르며 뒤엉킨다. 미친듯이 울기 시작하는 원현.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군중 속으로 뛰어드는 원현. 닥치는대로 치고 받는 원현. 지효:....... 그 모양을 바라보고 있는 지효. 백성 하나가 노비에게 밀려서 온다. 몸을 피하는 지효. 노비의 칼을 맞고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백성. 달려가는 노비. 지효:...... 칼을 맞고 쓰러져 부들부들 떨고 있는 백성. 원현, 그 옆에 떨어진 몽둥이를 집어든다. 길길이 날뛰고 있는 원현. 지효:...... 망설이던 지효가 몽둥이를 치켜들고 그 속으로 뛰어든다. #법왕사. 큰스님의 방 안(밤) 구석에서 짐을 싸며 힐끔힐끔 눈치보고 있는 덕운. 큰스님:....... 두 눈 지긋이 감고 몸을 흔들고 앉아있다. 신돈: 스님. 고려의 새역사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큰스님: 세상엔 끝이 없는 법이다. 끝이 없으니 또한 시작인들 있겠느냐 신돈:...... 큰스님:...... 눈을 떠서 신돈을 본다. 신돈:....... 큰스님:.......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더니 가만히 한숨을 쉰다. 신돈: 제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스님 큰스님: 네가 지금까지 겪은 고난은 앞으로 닥칠 고난에 비하면 티끌 같은 것이다 신돈:....... 큰스님: 짐 다 꾸렸느냐 덕운: 예, 스님 큰스님: 가자 벌떡 일어나는 큰스님. 울상 되는 덕운. #법왕사의 입구(밤) 큰스님을 따라 나오는 신돈. 덕운: 제 등에 업히시지요 스님 등을 대는 덕운. 큰스님: 이놈이 이제야 철이 나나보다 업히는 큰스님. 덕운, 비탈길로 내려간다. 신돈:(보고 있더니) 전하께선 부원배들을 다 몰아내시고 원에 빼앗겼던 고려의 옛 땅을 다 찾으실 겁니다. 헌데 그것이 어째서 고난입니까 스님 덕운이 멈춘다. 큰스님이 덕운의 어깨를 친다. 다시 가는 덕운. 신돈:(외치듯) 오늘 밤일을 보고 싶어 도성으로 올라오셨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스님. 그런데 어째서 고난입니까 스님 대꾸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큰스님. 신돈:........ 바라보고 있다. #도성의 길(밤) 백성들과 응양군들에게 밀려 도망치고 있는 부원배들의 사병들과 부원배들의 노비들. 여기저기서 죽어나간다. 덕운이 큰스님을 업고 이리저리 피해간다. 바로 옆에서 죽어나가는 노비 하나. 피가 튀긴다. 덕운, 찔끔해서 피한다. 그 등에 업혀서 코를 골며 자고 있는 큰스님. #법왕사의 입구(밤) 어둠 속에 여전히 우뚝 서있는 신돈. #선경전의 뜰 대신들이 웃고 떠들며 선경전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동. 안 웅성거리는 대신들. 염제신: 세상에 이렇게 후련할 수가 있나. 부원배들을 몽땅 쓸어버리고 나니까 앓던 이 빠진 것처럼 시원하군 그래 여기저기서 맞장구를 친다. 염제신: 헌데 전하께서 어째서 이렇게 늦으시는고. 전하를 뫼시고 목이 터져라 만만세를 외쳐야 할 게 아닌가 왁자지껄 웃고 떠든다. 이인복:...... 힐끔 김용을 본다. 웃고 떠들던 김용이 이인복과 눈이 마주치자 무안해서 고개를 슬며시 돌린다. 이인복:(이제현에게) 우정승대감께서 대전으로 들어가보시지요 이제현:(본다)...... 이인복:(속삭이듯) 어젯밤에 전하께서 몹시 당황해하시는 모습이 이제현: 어디 전하 뿐이셨는가. 지금은 저렇게 웃고 떠들고들 있지만 어젯밤엔 일이 잘못되는가 싶어 안전부절들 하질 않았는가 이인복:(웃으며) 우정승대감께서도 그러셨습니까 이제현: 부원배들의 힘이 그렇게까지 강하리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네 이인복: 팔십 년을 이어내려온 세도가 아니옵니까 이제현: 허기사 이인복: 앞으로가 중요합니다. 우정승대감께서 잘 하셔야겠습니다 이제현: 그게 무슨 소린가 이인복: 우선 시급한 것은 전하께서 어디까지 나가시려고 하는 건지 그걸 알아내서 수위를 조절하는 것이고 이제현: 어디까지 나가다니 이인복: 전하께선 쌍성총관부와 압록강 이남의 옛 고려 땅을 찾으려고 하십니다 이제현: 그럴 힘이 있을까, 우리 형편에 이인복: 여기서 멈추면 죽도 밥도 아니지요. 부원배들을 처단했다고 달라질 것이 뭐겠습니까. 공연히 원과 마찰이나 빚었지 소득이 없질 않습니까 이제현: 자네 생각도 그렇단 말인가 이인복: 전하의 생각을 말씀드린 겁니다. 슬며시 자리를 피해버리는 이인복. 그런 이인복을 바라보는 이제현. 최만생:(들어오며) 국왕전하께서 납시옵니다 환담을 멈추고 자리를 잡는 대신들. 공민왕이 빠른 걸음으로 들어와 용상으로 올라간다. 이제현: 전하. 경하드리옵나이다 대신들, 복창하며 이제현을 따라 무릎을 꿇고 예를 드린다. 공민왕:(앉자마자) 우리 태조께서 고려를 창업하고 관을 설치하고 법을 세워 상하가 서로 보존하여 지금에 이르렀소이다. 이제 기철, 권겸, 노책 등이 원과 맺은 인연을 내세워 고려의 법을 따르지 않고 임금을 능멸하여 백성들을 제 집의 노비인양 부리므로 과인이 이들을 모두 처단하였습니다. 이에 과인이 그 동안 잘못된 것을 다 바로 잡아서 제 자리에 돌려놓을 것입니다 비로소 숨을 돌리듯 말을 멈추는 공민왕. 이제현을 비롯한 대신들이 일어나 허리를 굽히고 선다. 공민왕: 먼저 기철 등 부원배들이 무고한 백성들로부터 약탈한 인구와 논밭을 억울함을 호소하는 백성들에게 모두 돌려줄 것입니다 대신들의 동요. 묵묵히 숙이고 있는 이제현. 공민왕: 또한 오늘부터 원나라의 연호인 지정을 쓰지 않고 새로 고려의 연호를 만들어 쓸 것입니다 이제현: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복창하는 대신들. 공민왕: 과인이 기철 등의 죄를 물으면서 여러 대신들과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오랫동안 조정의 기강이 무너졌기 때문이외다. 어제 기철 등을 처형하자 그 잔당이 저항을 하였는데 그 세가 만만치 않아 밤새도록 진압을 하지 못하다 새벽녘에야 겨우 토벌을 하였소이다. 이것이 어찌 그들만의 힘이겠소이까. 아직도 조정에 부원배들의 위세를 두려워하고 원을 상국으로 모셔온 폐습이 뿌리깊이 남아 있는 탓이 아니겠소이까 술렁이는 대신들. 공민왕: 내가 이것들을 다 바로 잡고자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고려의 옛 국토를 다 찾아 제자리에 돌려놓는 일이 시급하고도 시급합니다 웅성거리는 대신들. 공민왕: 인당과 강중경을 서북면 병마사로 삼고 신순과 최영을 부사로 삼아 압록강 일대의 파사부와 원의 팔 참을 공격하여 고려의 옛 땅을 찾으라 놀라는 대신들. 공민왕: 유인우를 동북면 병마사로 삼고, 공천보와 김원봉을 부사로 삼아 쌍성총관부를 수복하라 염제신: 전하. 지금 당장 원과 맞서 싸우라 하시는 것이옵나이까 공민왕: 이 두 가지 일은 하루도 미룰 수가 없소이다 벌떡 일어나 나가버리는 공민왕. 움직이지 않는 대신들. #곤성전의 안 공민왕:(웃으며) 기철과 부원배들을 모두 처단하였으니 이제 아버님의 장례를 정식으로 치르도록 하십시다 노국공주: 그 일은 서두르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공민왕: 억울하게 자결하신 아버님의 혼백이 구천을 떠돌아서야 되겠습니까 노국공주: 전하의 뜻을 다 이루시려면 아직 갈 길이 머옵나이다 공민왕:(웃으며) 염려마세요. 내가 조정에 나가 할 말을 다 했습니다 노국공주:.....(가만히 바라보는) 공민왕: 염려마시래두요 (시립한 김상궁을 보며) 그나저나 중전마마를 잘 모셔야 한다. 만에 하나 뱃속의 아이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내가 김상궁에게 그 책임을 물을 것이야. 알겠느냐 김상궁:(숙이는) 공민왕:(다시 노국공주를 보더니) 앞으론 만사를 나한테 맡겨놓으시고 편히 쉬세요. 그래야 옥동자를 낳으실 것 아닙니까 웃는 공민왕. 미소 지으며 가만히 배를 어루만지는 노국공주. #동. 뜰 나오는 공민왕. 따라나오는 안도치. 공민왕:(전각을 뒤돌아보며) 중전께선 웬 걱정이 저리도 많으신지 안도치: 전하 잔기침하는 안도치. 고개 돌리는 공민왕. 신돈과 초선이 나란히 비켜 서있다. 공민왕: 마침 잘 들어왔다. 그러지 않아도 사람을 보내려던 참이다 신돈: 경하드리옵나이다 전하 공민왕:(웃으며) 네가 어젯밤의 내 꼴을 봤어야하는데......(웃는다) 신돈: 무슨 말씀이시온지 공민왕: 내가 선경전에 나가 밤새도록 도성을 지켜보았다. 부원배들의 기세가 좀처럼 누그러지질 않으니 슬며시 불안한 것이......(웃는다) 신돈: 소신 역시 불안하여 한숨도 못잤습니다 공민왕: 너는 담대한 자라 두 다리 쭉 뻗고 자고 있는 줄 알았다 (웃더니 초선을 보며) 중전을 뵈러 들어오셨는가 초선: 예, 전하 공민왕:(들어가라는 손짓하며) 자넨 나 좀 보자 앞서가는 공민왕. 초선을 보고 빙긋 웃고 공민왕을 따라가는 신돈. #대궐의 길 나란히 걸어오는 공민왕과 신돈. 그 뒤를 따라오는 최만생 등 환관들. 공민왕: 내가 자네한테 선물을 하나 줄 것이야 신돈: 고맙습니다 전하 공민왕:(멈추며) 무슨 선물인지 들어보지도 않고 인사부터 하느냐 신돈: 전하께서 주시는 선물을 소신이 어찌 되물어보겠나이까 공민왕:(가며) 오늘 조정에서 내가 부원배들이 양민에게서 뺏은 땅을 모두 원래 주인들에게 돌려주고 노비로 삼은 양민들을 모두 풀어주라고 했다 신돈:..... 공민왕:(다시 멈추더니) 편조야 신돈: 예, 전하 공민왕: 내가 그 일을 너한테 맡길 생각이다 신돈:..... 감격의. 공민왕: 싫으냐 장난스럽게 웃어보이는 공민왕. #곤성전의 안 배를 부둥켜 안고 있는 노국공주. 초선: 황공하오나 마마. 식은 땀을 자주 흘리시옵나이까 노국공주: 통증이 심해서 견딜 수가 없느니라 초선:..... 가만히 노국공주를 바라보는 초선. 겨우 진정하고 숨을 내쉬는 노국공주. #대궐의 길 공민왕: 어째 좋아하는 기색이 아니구나 신돈:..... 공민왕: 네가 바라던 것이 그것이 아니냐 신돈: 정녕 전하께서 그 일을 소신에게 맡기실 겁니까 공민왕: 그렇다니까 신돈:..... 공민왕: 어디 니 마음대로 해보아라 웃는 공민왕. 따라 웃는 신돈의 두 눈에 웃음과 함께 고이는 눈물. <신돈 제29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