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돈 7회 <신돈> -7회- #연경의 어느 집. 마당(밤) 안채 문이 열리고 보쌈한 여인을 어깨에 들쳐 멘 신돈이 살금살금 나온다. 발소리. 얼른 벽에 몸을 숨기는 신돈. 집안을 감시하는 사내들이 히히덕거리며 온다. 버둥거리는 자루 속의 여인. 신돈, 얼른 여인을 내려 벽에 붙이고 입을 막는다. 신돈: 쉬이, 난 고려인이오. 살고 싶으면 조용히 하시오 조용해지는 여인. 사내들이 신돈을 지나쳐 집 모퉁이로 돌아간다. 안도의 한숨 내쉬는 신돈. 공민왕:(소리) 어허, 가만히 있으래도 그런다 다시 놀래서 바라보는 신돈. 공민왕이 자갈을 물린 계집을 들쳐 업고 나타난다. 공민왕: 앙탈깨나 부리는 것이 내가 쓸만한 계집을 골랐나보다 계집의 볼기를 철썩철썩 때리며 웃어대는 공민왕. 신돈:(다급해서) 대군마님 공민왕: 앗따 그년. 힘깨나 쓰는구나 계집을 내려놓는 공민왕. 불안해서 사내들이 사라진 곳을 살피는 신돈. 공민왕: 재갈을 풀어줄 것이니 조용히 해야 한다. 알겠느냐 신돈이 말릴 사이도 없이 계집의 입에 물린 재갈을 풀어주는 공민왕. 계집이 중국말로 살려달라고 소리친다. 공민왕: 이런, 내가 계집을 잘못 골랐구나. 고려에서 끌려온 공녀인 줄 알았더니 원나라 계집이 아니냐 혀를 차며 비명을 질러대는 계집을 태연히 나무라고 있는 공민왕. 여기저기서 달려오는 소리. 보쌈한 여인을 들쳐 메고 담으로 달려가 뛰어오르는 신돈. 계집에게 재갈을 물리려고 실갱이 하며 웃고 있는 공민왕. 담 위에서 그 모양을 바라보고 있는 신돈. 장정들이 달려와 불문곡직 공민왕을 공격한다. 휘청거리듯 피하며 맞받아치는 공민왕. 삽시간에 서너 명이 급소를 맞고 쓰러진다. 흠칫 물러서는 장정들. 일제히 칼을 뽑아들고 다시 공민왕을 공격한다. 이리저리 도망치며 장정들의 칼을 피하는 공민왕. 점점 위험에 처하는 공민왕. 신돈:........ 고개를 설래설래 젓더니 메고 있던 공녀를 담밖으로 내던지고 마당으로 뛰어내린다. 공민왕을 에워싼 장정들의 머리 위로 날아오르며 가격하는 신돈. 공민왕을 향했던 장정들이 신돈을 향해 덤벼든다. 슬며서 물러서 그 모양을 재밌다는 듯 바라보고 있는 공민왕. 장정들의 칼날을 이리저리 피하며 주먹과 발길질을 날리는 신돈이 위기를 느끼고 칼을 하나 뺏어들고 장정들을 후려치기 시작한다. 여기저기 쓰러지는 장정들. 신돈의 무술에 놀란 장정들이 도망치기 시작한다. 가뿐 숨을 진정하며 공민왕을 돌아보는 신돈. 공민왕: 땡중이라고 하더니 진짜 스님이 아닌가 신돈:(노려보듯 본다) 공민왕: 칼날 대신 칼등으로 쳤겠다. 하긴 스님이 살생을 해서야 쓰나 껄껄 웃어대는 공민왕. #동. 대문. 앞(밤) 대문이 활짝 열리고 공녀들이 쏟아져 나와 사방으로 도망친다. #동. 마당(밤) 칼을 움켜쥔 채 우뚝 서 있는 신돈. 공민왕: 나와 겨뤄보겠다? 신돈:.......(노려본다) 공민왕:....... 싱긋 웃더니 칼을 집어든다. 신돈: 조심하시지요. 이번엔 칼등대신 칼날을 쓸 겁니다 몸을 날려 공민왕을 공격하는 신돈. 달빛 아래 칼과 칼이 부딪히는 낭랑한 소리. #개태사의 마당(밤) 달빛에 젖은 마당. 큰스님의 방을 기웃거리는 곰순이네. 창문에 반야를 업은 큰스님의 모습이 보인다. 반야의 칭얼거리는 울음소리. 곰순이네: 큰스님. 쇤네가 봐드릴까요 안에서 대꾸 대신 반야를 어르는 큰스님의 소리만 들린다. #연경의 어느 집. 마당(밤) 칼과 칼이 허공에서 맞부딪치며 달빛을 가르며 날아오르는 신돈과 공민왕. 마치 춤추듯 두 사람의 혈투가 계속된다. #개태사의 큰스님의 방 안(밤) 반야를 업고 어르는 큰스님. 계속 칭얼대는 반야. 곰순이네:(밖에서) 스님. 쇤네에게 맡기시고 그만 주무세요 대꾸 없는 큰스님. 덕운: 허리도 좋지 않으신데 그 아인 왜 그렇게 끼고 도십니까 큰스님: 이놈아. 이 아이가 편조가 세상에 남기고 간 유일한 끈이야 덕운: 그럼 이 애가 편조의 혈육이란 말씀입니까 큰스님: 이 놈 보게. 이 아이가 편조와 세상을 이어주는 끈이라고 했지 내가 언제 혈육이라고 했냐 덕운: 그런다고 편조가 살아서 돌아오겠습니까. 배가 풍랑에 뒤집혀 산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데요 큰스님: 그 놈이 그렇게 쉽게 죽을 명이 아냐 덕운: 그나저나 이리 주십시오. 제가 업어서 재우겠습니다 등을 갖다대는 덕운. 큰스님: 이 녀석이 달구경이 하고 싶어서 잠을 안 자나 슬며시 반야를 업고 밖으로 나가는 큰스님. #연경의 어느 집. 마당(밤) 칼날을 세우고 마주보는 신돈과 공민왕. 순간 서로를 치며 스치고 지나간다. 다시 멎는 두 사람. 공민왕:...... 가슴을 내려다본다. 신돈의 칼날이 공민왕의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는지 옷이 찢어졌다. #개태사의 마당(밤) 달. 등에 업힌 반야를 일으켜 세우듯 해서 달을 보라고 하며 어르고 있는 큰스님. 반야가 큰스님 등에서 떨어질까봐 안절부절하는 덕운. 그 모양이 우스워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고 있는 곰순이네. #연경의 어느 집. 마당(밤) 공민왕:...... 신돈:....... 식은땀이 흐르는 신돈. 싱긋 미소 짓는 공민왕. 들고 있던 칼을 내던진다. #공민왕의 처소. 마당 정세운이 들어온다. 마당에서 서성거리던 안도치가 반갑게 맞는다. 안도치: 마침 잘 오셨습니다 정세운: 무슨 일이 있는가 안도치:....... 방을 살피며 안절부절하는 안도치. 정세운: 무슨 일인데 그러시나 방에서 공민왕의 웃음 소리가 들려온다. 공민왕:(안에서) 내가 졌으니 앞으로 한달 간은 자넬 내 형님으로 모시마 #동. 방 안 식탁에 마주앉은 공민왕과 신돈. 공민왕: 그런 연후에 다시 겨뤄서 또 내가 지면 자넬 평생 사부님으로 모실 것이다 (웃고) 자, 그러니 개의치 마시고 드시지요 (길게) 형님 불편해서 어쩔 줄 모르는 신돈을 놀리듯 웃어대는 공민왕. 공민왕: 자, 어서 드시래두요 젓가락까지 쥐어주는 공민왕. 마지못해 한입 떠먹는 신돈.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정세운. 정세운: 네 이놈. 근본도 모르는 놈을 우리 대군께서 거둬주셨더니 이젠 방자하게 겸상을 하자고 대들어? 얼른 일어나 뒤로 물러서 고개를 숙이는 신돈. 공민왕: 왜 이러나 이 사람. 내가 이 자와 형님 아우 내기를 했는데 내가 졌으이. 그러니 정세운:(피를 토하듯) 대군마님. 고려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겠다던 큰 뜻은 다 잊으셨습니까 공민왕: 이 사람.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고려를 다시 일으켜 세워 정세운: 대군마님 공민왕: 자, 그러지 말고 자네도 이리 와서 앉게. 우리 셋이서 아침이나 맛있게 먹세 그려 (웃어보이고) 자네도 이리 와서 다시 앉아 신돈을 손짓하는 공민왕. 숙이고 서있는 신돈. 공민왕: 날 어려워할 게 없대도 그런다 정세운:..... 눈물이 핑돈다. 밖으로 뛰쳐나가는 정세운. #동. 마당 나오는 정세운, 대문으로 간다. 안도치: 정공께서도 대군마님을 떠나시는 건 아니겠지요 정세운:......... 안도치: 김용과 조일신이 개경으로 돌아가고 난 후 이제 남은 사람이라곤 정세운: 나는 죽는 날까지 대군을 모실 것일세 긴 한숨 내쉬고 밖으로 나가는 정세운. #동. 방 안 신돈:....... 바라본다. 식탁에 멍하니 앉아있는 공민왕. 바라보는 신돈. 공민왕:.....생과 사가 종이 한 장 차이듯이 귀하고 천한 것이 또한 손바닥과 손등의 차이가 아니냐..... 신돈:....... 공민왕:.....나는 천한 것이 편하다 신돈:(불쑥) 그래야 세상이 바로 보입니다 공민왕:.....(가만히 본다) 신돈: 고려에서 끌려 온 공녀들을 보쌈해서 즐겨보자는 대군마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나서면서 소인은 이미 색정에 몸이 달아올랐습니다 공민왕: 실망했느냐 신돈: 보쌈한 고려 여인을 몇 명 구해줬다고 세상이 바뀌겠습니까 공민왕: 헌데 왜 도망치지 않고 목숨을 걸었느냐 신돈: 어젯밤에 소인은 대군마님께 귀한 것이 무엇인가를 배웠습니다 공민왕:....... 신돈: 천해야 세상이 바로 보이나 귀한 마음이 없다면 어찌 세상을 바꿀 수가 있겠습니까 공민왕:.......(바라본다) 그 눈을 스치고 지나가는 쓸쓸한 미소. #연경의 거리 장을 보러 다니는 안도치와 신돈. 이것저것 물건을 고르는 안도치. 안도치가 산 물건들을 두 팔에 잔뜩 안고 있는 신돈. 안도치: 그 어른이 꽤나 적적하셨나보다. 자네 같은 땡중을 곁에 두고 희롱을 하고 계시니 혀를 차다 문득 신돈을 바라보는 안도치. 싱글싱글 웃고 있는 신돈. 안도치: 아무리 봐도 자넨 스님 상이 아냐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안도치. #동. 부근 만두 가게 만두를 먹고 있는 안도치와 신돈. 안도치:(힐끔 보며) 칼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구? 신돈: 대군마님보다는 한 수 밑이더이다 안도치: 그런 놈이 대군마님 옷에 흠집을 내? 신돈:(먹기만) 안도치: 명심해라 이 놈. 내가 항상 네 놈을 감시하고 있다는 걸 신돈: 강릉대군의 목숨값이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안도치: 뭐, 뭐야 신돈: 강릉대군의 목을 가지고 개경에 간들 몇 푼이나 받겠느냐 그 말입니다 안도치:(당황해서 킁킁거리는) 신돈: 하긴 떡본김에 제사 지낸다고 칼든 김에 슬며시 욕심이 치밀더이다. 또 압니까. 강릉대군의 목을 개경으로 가져가면 안도치: 엣끼 이 놈. 그 흉측한 소리 집어치지 못할까 신돈:(웃으며) 그나저나 웬 의심이 그렇게 많으십니까. 불알 대신 여기다 의심보따리를 차고 다니시나 봅니다 안도치의 아랫도리를 툭 치며 놀리는 신돈. 안도치: 아니 이 놈이 펄쩍 뛰면서도 신돈이 밉지 않은 듯한 안도치. 원현:..... 길 건너에서 두 사람을 유심히 보는 원현. 신돈의 웃는 옆모습이 보인다. 원현: 편조스님 달려간다. 신돈:(웃으며) 밥 주고 술 주고 재워주는데 내가 왜 그 어른의 등을 치겠습니까. 큼지막한 봉을 한 마리 잡았는데요 안도치: 봉이라니 이 놈 원현: 편조스님 신돈이 웃으며 얼굴을 돌린다. 원현: 살아계셨습니다 편조스님 환하게 웃는 원현. 너무 좋아서 신돈을 얼싸안고 어쩔 줄 모르는 원현. #연경의 다른 거리 탁발을 하고 있는 지효. 원현:(소리) 지효스님 여기 좀 보세요. 편조스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탁발을 거두고 돌아보는 지효. 환하게 웃고 있는 원현. 신돈이 서있다. 원현: 제가 뭐라고 그랬습니까. 제가 본 사람이 틀림없는 편조스님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효:(조용히) 나무관세음보살 (합장한다) 신돈: 용케들 살아계셨군. 난 나 혼자 살아남은 줄 알았더니 원현: 다 부처님 공덕이지요 신돈: 부처님 공덕 덕분에 죽은 사람이 몇이나 되는데 그런 말씀을 하시나 원현: 편조스님도 참. 우리 세 사람이 살아난 게 부처님 공덕이 아니면 뭐란 말씀입니까 신돈: 배가 뒤집힌 건 염불이나 읊고 앉았던 중놈들 때문이야. 목탁 대신 사공을 도와 노를 잡았다면 그 많은 사람이 죽었겠나. 나는 그 날 이후로 부처님과 인연을 끊었네 돌아서 가는 편조. 원현: 편조스님, 어딜 가십니까 부지런히 신돈을 따라가는 원현. 또 한번 가만히 합장배례하는 지효. #동. 다른 거리 성큼 오고 있는 신돈. 그 뒤를 따라오는 원현. 원현: 편조스님. 편조스님 신돈:(돌아서더니) 앞으론 그 스님 자는 빼고 그냥 편조라고 부르게 원현:(기막힌) 신돈: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세 다시 가는 신돈. 원현:(따라오며)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모르지만 이건 편조스님의 참뜻이 아닐 겁니다 신돈: 그 스님 자는 빼래두 그런다 원현:(막으며) 편조스님. 이러자고 연경까지 온 게 아니잖습니까 신돈:........ 원현: 나는 편조스님이 살생을 했을 때도 편조스님의 본성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분명 큰 뜻이 있는 분이시니 신돈:(막듯이) 자네가 사람을 잘못 본 거야 원현:(본다)...... 신돈: 천지개벽이 일어난다고 노비의 자식이 보우 같은 선사가 되겠나 원현:(대들듯) 그럼 백정의 자식도 귀족이 되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한 건 그냥 하는 소리였습니까 신돈:....... 원현:(토하듯) 그렇습니까 신돈: 그 말을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그 말씀인가 (일어나며) 원현스님은 참으로 생불이시네 허허 웃고 다시 가는 신돈. 원현:(외친다) 어딘가 새로운 세상이 있을 겁니다. 이 넓은 천지에 무엇인들 없겠습니까 멀어지는 신돈. 원현:....... #동. 만두 가게 장 본 물건을 주섬주섬 집어 들어 안는 신돈. 그런 신돈을 힐끔거리는 안도치. 신돈: 이래도 못 믿겠습니까. 머리 깎은 중놈이 편조스님 편조스님하고 불러대는데도 안도치:..... 여전히 미심쩍어 바라보는 안도치. #동. 다른 부근 묵묵히 걸어오는 원현. 다리를 건너려다 멈춰서 흐르는 냇물을 바라본다. 지효: 사람마다 가는 길이 다른데 뭘 그렇게 괴로워 하십니까 원현: 편조스님은 노비의 자식이고 나는 백정의 자식입니다 지효:......나무관세음....... 중얼거리며 합장한다. 원현: 철이 들어서 애비처럼 사는 게 싫어서 죽기로 작정하고 무조건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지요. 헌데 마침 지나가던 편조스님이 물 속에서 나를 구해줬습니다 지효:.......(가만히 바라보는) 원현: 나는 그 때 이미 죽은 사람이라 그 후의 나는 편조스님이 만든 겁니다 지효: 그런 사연이 있었습니다 (미소) 원현:(보더니 웃으며) 참 지효 스님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셨겠지요 지효: 불자가 태생은 따져서 무엇 하겠습니까 (웃으며) 그만 가시지요 앞서가는 지효. 원현: 무슨 까닭이 있는 거겠지요. 부처님을 버릴 편조스님이 아닙니다 묵묵히 걸어가는 지효. 여전히 미련이 남아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하는 원현. #강릉대군의 집. 방 안(밤) 밥상. 공민왕:....... 우두커니 앉아있다.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는 안도치. 가만히 한숨을 내쉬고 일어나는 공민왕. 안도치: 몇 수저 드시지요 대군마님 말없이 밖으로 나가는 공민왕. 뚜껑도 열지 않은 밥상. #동. 마당(밤) 안도치, 나온다. 안도치:....... 공민왕이 뒷짐을 지고 휘영청 보름달을 쳐다보고 서있다. 그 모습에 가만히 눈물을 훔치는 안도치. 공민왕:....그 자가 칼을 비켜 들고 서서 나를 노려보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보기 좋았다 안도치:....... 공민왕: 허나 그 자와 맞서기를 불과 서너합이 지나기도 전에 나는 그자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헌데 그 자의 칼끝이 번번히 내 급소를 피해가는 것이 아니냐 안도치:...... 공민왕: 얼마나 애타게 기다려 왔는지 아느냐. 누군가 나를 죽여주기를..... 괴로운 듯 눈을 감고 오열을 참는 공민왕. 안도치:(흐느끼듯) 대군마님 공민왕: 잊혀진 게야 나는. 개경에서도 연경에서도 피를 토하듯 외치는 공민왕. 안도치:(통곡하듯) 대군마님 공민왕:(돌아서더니 미친듯이) 그 자가 정곡을 찔렀다. 내 목의 값어치가 얼마냐. 내 목은 개경에 가져가도 밥 한 끼 얻어먹을 수 없는 살덩이에 불과하지 않느냐. 그러니 도치야 그 자를 업수히 여기지 마라. 내가 그 보다 더 천한 인간이다 #노국공주의 처소. 마당 홍화의 웃음소리. 홍화:(안에서 소리) 공주마마께서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처음 봤으니까 그렇죠 #동. 안 수를 놓다 말고 얼굴을 붉히고 있는 노국공주. 홍화: 그뿐인 줄 아세요. 요즘은 걸음걸이도 얌전해지셨구요 (걸음 흉내 내고) 매일같이 화장도 하시죠. 그러더니 오늘은 수까지 놓고 계시니 누가 공주님을 말타고 사냥이나 다니던 보탑실리 공주님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노국공주: 자꾸 놀리면 태자궁엔 다른 시녀를 데리고 갈 거야 홍화: 피. 저 없이 불편해서 하루도 못사실 걸요 밖에서 소란. 노국공주: 밖에 무슨 소리냐 홍화: 제가 나가 볼게요 얼른 밖으로 달려나가는 홍화. 노국공주:...... 수틀을 본다. 힘차게 뛰어오르는 말의 형상이다. 빙긋 미소 짓는 노국공주. 한숨 내쉬고 다시 수를 놓기 시작하는 노국공주. 문이 열리며, 홍화: 공주님. 빨리 좀 나와보세요. 어서요 노국공주: 무슨 일인데 호들갑이냐 홍화: 아버님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울음부터 터지는 홍화. 불길한 예감에 밖으로 달려나가는 노국공주. #동. 마당 달려 나오는 노국공주. 위안을 포박해 끌고가는 군인들. 노국공주: 아버지 달려가는 노국공주. 그 앞을 막는 장교. 노국공주: 이게 무슨 짓이냐 노국공주를 가로막은 장교가 위안의 가슴을 가리킨다. 위안의 목에 걸려있는 ‘반역’이라고 쓰인 팻말. 놀라는 노국공주. #순제의 처소. 안 쿤란태자: 폐하. 위안은 폐하께 반역할 사람이 아닙니다 순제: 위안이 몽골로 돌아가 새로운 왕국을 세우자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니며 추종자들까지 모았다고 하니 이게 반역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쿤란태자: 위안은 원 제국을 세웠을 때의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한 것뿐입니다 폐하 순제:(벌떡 일어나며) 위안이 새 왕국을 세우고 그 왕국의 황제로 세우려고 했던 자가 누군지 아느냐. 바로 쿤란 너였다 쿤란태자:(기막힌) 순제: 네 이름이 거론된 것만으로도 극형을 면치 못할 것이나 기황후가 간곡히 부탁을 하는 바람에 귀양을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끌고 나가라 밖에서 뛰어들어오는 어영군들. 쿤란태자: 폐하. 기황후는 제 어머니를 죽인 요붑니다. 그 요부에게 속아 이번엔 자식마저 죽이려고 하십니까 순제: 꼴보기 싫다. 어서 끌고 나가라 얼굴을 돌리는 순제. 쿤란태자:(끌려 나가며) 폐하. 기황후를 살려두시면 나라가 망합니다. 폐하께서 주지육림에 빠지신 것은 기황후의 훙곕니다. 폐하. 부디.......(끌려 나간다) 순제: 저런 불효막심한 놈이 있나. 저 놈이 나를 폭군이라고 부르고 있질 않느냐 분해서 씨근대는 순제. 기황후:(소리) 잘하셨습니다 페하 휘장 밖에서 나오는 기황후. 순제: 황후가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 했소. 하마터면 자식 손에 목숨을 잃을 뻔 했소 기황후: 다 잊어버리시고 편히 쉬세요. 뒷 일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손짓한다. 여인들이 나와 순제를 에워싼다. 뒤따라 라마승이 쟁반에 약을 받쳐들고 온다. 기황후, 약을 순제에게 권한다. 마시는 순제. 금방 나른해지는 순제. 순제: 참으로 신기한 묘약이다. 혀 끝에 닿기만해도 극락세계가 바로 눈앞에 보이니 환락에 젖어 허우적거리기 시작하는 순제. #동. 복도 나오는 기황후. 박불화: 보탑실리 공주도 잡아들이시지요. 아비 못지 않은 반골입니다 기황후: 내버려두어라. 따로 쓸 데가 있으니 싱긋 웃더니 유모의 손을 잡고 서있는 아유시리다라를 번쩍 들어올린다. 기황후: 에미가 네 생일 선물로 원 제국을 주마 깔깔거리며 웃는 기황후. #선경전의 뜰 염제신:(소리) 일찍이 대비께서 섭정을 하신 적은 있으나 정사당까지 들어와서 정사를 논한 적은 없었습니다. #동. 안 용상의 충정왕. 옆자리의 희비 윤씨. 염제신: 선왕의 모후이신 덕녕공주께서도 영수전에서 따로 보고를 받으셨습니다 희비윤씨: 으음 못마땅해서 바라본다. 염제신: 하오니 대비께서는 영수전으로 물러가 계시는 것이 윤시우:(나서며) 덕녕공주께서도 국가의 대사가 있을 때에는 정사당까지 나오신 적이 있소이다 염제신: 나는 못 봤소이다 (이제현에게) 익재대감께서는 보셨소이까 이제현: 으흠 술렁이는 대신들. 기철은 턱수염만 뜯고 있다. 희비윤씨: 말씀들이 많으시니 앞으로는 삼가겠습니다 모두, 본다. 희비윤씨: 허나 국가의 대소사를 여러 대신들이 일일이 찾아와 고할 수는 없을 것이니 대신 밀직부사 윤시우를 도첨의 찬성사로 삼아 나를 대신하게 할 것입니다 술렁이는 대신들. 모두 기철을 본다. 턱수염을 뜯다 말고 헛트림을 하는 기철. 슬며시 최만생을 노려본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최만생. 희비윤씨: 들어가시지요 전하 충정왕의 손을 잡아 일으켜 끌고나가듯 나가버리는 희비윤씨. 허리를 굽히는 대신들. #동. 뜰 흩어지는 대신들. 귓속말을 주고 받으며 나오는 염제신과 이제현. 기철:(뒤에서) 혹 떼려다 되려 혹을 하나 더 달으셨소이다 염제신:(보더니).......(끄응 신음) 기철: 기철이란 놈이 벌건 대낮에 날벼락을 맞고 죽어야 나라 꼴이 바로 된다고 하시더니 소원대로 내가 날벼락을 맞았소이다. 그러니 자알.....해보시오 웃어대며 가버리는 기철. 염제신: 어허, 이 일을 어쩐다. 전하의 보령이 이제 겨우 열 셋이시니 이제현: 너무 나서지 마세요 개숙. 가만히 계셔도 한바탕 풍운이 일 것이니 #기철의 사랑방. 안 턱수염을 뜯으며 입을 우물거리는 기철. 기원: 형님. 그냥 다 죽여버립시다 기철:...... 기원: 우리 형제들의 사병만으로도 다 때려 죽일 수가 있어요. 윤시우도 때려죽이고 희비윤씨도 쳐 죽이고, 그 아들놈도 죽여 버립시다. 뒷 일은 누이 동생이 해결해주지 않겠습니까 기철: 으음 기원: 아, 뭐가 무서워서 그래요 형님 기철: 무섭기는 이놈아. 그깟 년놈들을 쳐죽이는 거야 오늘 못하면 내일 해도 되는 일이지만 (끄응 신음) 기원: 그런데요 기철: 어느 놈을 대신 그 자리에 앉힐지 그게 쑥 떠오르질 않는단 말이다 끄응 신음하며 생각에 잠기는 기철. #명덕태후의 사저. 안방 명덕태후: 오늘 떠나시려구요 덕녕공주: 예.......어머님 명덕태후:(한숨 쉬며) 이 일을 어쩌나. 연경에 가면 여러 모로 적적할 텐데 (점점 고개 돌리고 눈물 훔치는 시늉을 한다) 덕녕공주: 또 언제 찾아 뵐지 고개 숙여보인다. 일어날 기세다. 명덕태후: 옳거니. 연경이 가시면 기황후가 있질 않습니까 (웃으며) 그 양반이 원래 고려 분이시니 잘 돌봐주겠지요 덕녕공주: 저 같은 것이 눈에 들어오기나 하시겠습니까 명덕태후: 원래 그 양반하고 연줄이 없으셨던가 덕녕공주:(웃으며) 어머님께선 그 분과 가까우십니까 명덕태후: 가까웠었지 (기가 막히다는 코웃음 치며) 그 놈의 욕심. 그렇게 갖다바쳤는데도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 없으니 덕녕공주:(웃으며) 제 염려는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연경에서 서너달 쉬며 주변을 정리한 다음에 절로 들어갈까 합니다 명덕태후: 절이라니. 그게 무슨 소린가 덕녕공주:....... 그저 미소 짓는. 명덕태후: 세상에 대궐에 있는 놈들은 다 무얼 하고 있길래 자넬 절간으로 보낸단 말인가. 임금이 어리니 별 해괴망칙한 일도 다 벌어지는구나 펄펄 뛰는 시늉하며 덕녕공주의 눈치를 보는 명덕태후. #동. 집 앞 나오는 덕녕공주. 뒤따라 나오는 김상궁. 짐은 실은 말들과 약간의 호위병들. 덕녕공주가 나오자 시종이 말을 끌고 온다. 김상궁: 말을 타시려구요 마마 덕녕공주: 여기서 연경이 하룻길인가? 가마를 타고야 못 가지 김상궁:(걱정스럽다) 덕녕공주: 걱정 말게. 난 본래 몽골의 여자니 어려서부터 말을 타고 자랐네 단숨에 말 위에 오르는 덕녕공주. 말고삐를 채더니 달려간다. 그 뒤를 따르는 짐꾼들과 시종. #동. 안방 명덕태후: 말을 타고 가? (혀를 찬다) 김상궁: 말을 타고 달리는 모습이 대장부처럼 늠름하셨습니다 명덕태후: 오랑캐들이라니. 궁중의 아녀자가 말을 타고 가? 기가 막히다는 듯 코웃음 치는 명덕태후. #기황후의 처소. 방 안 시녀들에게 둘러싸여 발 안마를 받으며 손톱을 다듬고 있는 기황후. 그런 기황후를 노려보고 서있는 노국공주. 기황후: 설마하니 폐하께서 쿤란태자를 죽이기야 하시겠느냐. 아버지 일도 염려마라. 위안은 충신이니 죽이지는 않으실 게야 노국공주:.....(겨우) 고맙습니다......황후폐하 고개를 숙여보인다. 기황후:(지그시 보며) 요즘은 시집 갈 준비를 하느라고 사냥을 삼가고 집 안에서 수 놓는 법을 배우고 있다지? 노국공주: 황후폐하 기황후:(고개 돌리며) 쿤란태자는 왕자로 격하되어 변방으로 쫓겨날 거다. 폐하의 노여움이 풀리면 다시 돌아오겠지만 그게 언제가 될런지.....(웃으며) 그러니 내가 대신 좋은 혼처를 하나 구해주마 노국공주: 태자전하와 혼인할 수 없다면 전 평생 혼자 살 겁니다 기황후: 그래서야 쓰나 노국공주: 황후폐하께서는 원하는 것을 모두 얻었습니다. 소원대로 아유시리다라가 폐하의 후계자가 될 것이니 쿤란태자와 내 사이까지 갈라놓을 건 없지 않습니까 훽 돌아서 나가는 노국공주. 기황후: 그렇게 고집을 부리면 쿤란태자와 네 아비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노국공주:...... 멈춘다. 기황후: 잘 생각해 보거라. 쿤란태자와 위안의 목숨은 네 손에 달려 있으니 노국공주:....... 망설인다. 그러나 이내 떨쳐버리고 나가버린다. #동. 뜰 나오는 노국공주. 홍화: 어떻게 됐습니까 공주마마 노국공주: 아버지와 쿤란태자를 살리고 싶으면 딴 곳으로 시집을 가라? 흥, 그러느니 자결을 하고 말지 #동. 안 시녀들을 물리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기황후. 박불화:.......(눈치보며) 황후폐하. 소인이 미련하여 폐하의 큰 뜻을 헤아리기는 어려우나 굳이 보탑실리 공주와 쿤란태자의 혼사를 막으시려는 까닭이..... 기황후: 폐하께서 쿤란태자를 죽이시겠느냐 박불화:....... 기황후: 머잖아 쿤란태자를 의심한 것을 후회하실 거야. 만사에 우유부단한 폐하시니 그러고도 남으실 분이지. 그리 되면 쿤란태자는 변방에서 연경으로 돌아올 것이고 위안과 손을 잡고 우리 모자를 죽이려고 들 것이 뻔하지 않으냐 박불화:......(감탄의) 기황후: 그러니 위안의 딸년이 쿤란태자와 혼인하는 것부터 막아야지. 그런 연후에 위안을 죽이고 때를 봐서 쿤란태자를 아예 없애버려야지 박불화: 참으로 황후폐하의 생각은 깊고도 깊으십니다 감탄하고 또 감탄해보이는 박불화. #연경부근의 숲 길 쿤란태자가 호위병 서 넛을 거느리고 쓸쓸히 가고 있다. 쿤란태자:...... 말을 멈춘다. 언덕 위에 노국공주가 탄 말이 보인다. 노국공주:..... 쿤란태자를 바라본다. 말을 재촉해서 달려가기 시작하는 쿤란태자. #동. 다른 길 쿤란태자, 달려온다. 옆길 숲을 따라 나란히 달려가고 있는 노국공주. 말을 멈추는 쿤란태자. 다시 앞 길을 가로 막고 서는 노국공주. 고집스러운 모습이다. #동. 부근의 어느 냇가 물을 마시고 있는 말 두 필. 쿤란의 품으로 파고드는 노국공주. 쿤란태자: 그만 돌아가시오 노국공주: 싫어요 쿤란태자: 나는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요 노국공주: 그러니까 같이 가야죠 쿤란태자: 보탑실리 노국공주를 떼내어 잡는 쿤란태자. 쿤란태자: 기황후는 나를 살려두지 않을 거요 노국공주: 나도 같이 죽겠어요 쿤란태자: 아버지가 죽는 걸 보고 싶어요 노국공주:.......(치미는) 쿤란태자: 기황후가 시키는대로 해요. 그래야 아버질 살릴 수가 있어요 노국공주: 태자전하가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도 싫어요 울면서 쿤란태자의 품에 파고드는 노국공주. 그런 노국공주를 안아주는 쿤란태자. 그 품에 안겨 흐느끼는 노국공주. 쿤란태자:...... 가만히 노국공주의 얼굴을 감싸쥐더니 눈물을 닦아준다. 쿤란태자: 내 말 잘 들어요. 기황후가 무서워하는 사람은 위안이요. 조정엔 위안을 따르는 사람이 많아요.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위안을 죽이려고 들거요 노국공주: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죠 (다시 울음이 터진다) 쿤란태자: 보탑실리 노국공주: 그러니까 기황후의 말대로 시집을 가라는 거잖아요 쿤란태자: 위안이 살아있어야 나도 살 수가 있어요 노국공주:....... 쿤란태자: 나를 살려줄 사람은 당신 아버지 뿐이란 말이오. 내 말을 모르겠소 노국공주:.... 문득 울음을 그치는 노국공주. 가만히 쿤란태자를 바라본다. 쿤란태자:(와락 노국공주를 끌어안으며) 약속하리다. 내가 살아서 돌아오면......내가 만일 살아서 돌아온다면..... 말을 잇지 못하는 쿤란태자. 쿤란태자에게 몸을 맡긴 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노국공주. #기황후의 처소. 방 안 기황후:(찡그리며) 강릉대군이라니 박불화:(비굴하게 웃고 있는) 기황후: 하필이면 볼모로 잡혀와 있는 고려의 왕자냐 박불화: 고려는 변방이니 고려의 왕자에게 시집을 가면 보탑실리 공주가 쿤란태자와 다시는 손을 잡을 수 없을 것이고 또한 두 사람을 고려로 보내 살게 하면 고려엔 황후폐하의 오라비가 있는 곳이니 옴짝달싹을 못할 것이 아니옵니까 기황후: 강릉대군의 에미가 녹녹한 여자가 아니지 않으냐 박불화: 황후폐하께는 충성을 바칠 겁니다. 그 간에 개경에서 보내온 재물만 해도...... 웃어 보이는 박불화. 기황후: 필경 강릉대군의 어미가 고려의 왕 자리를 달라고 떼를 쓸 텐데 박불화: 그거야.....(웃어보인다) 기황후: 으음. 쿤란과 위안을 죽일 수 없다면 보탑실리의 혼사를 서두르는 게 좋겠다 기분이 좋아서 싱긋 웃는 기황후. #동. 뜰 안도치: 뭐라고 하십니까 박불화: 쉬운 일이 아닐세 거들먹거리고 있는 박불화. 안도치:(마른침) 박불화: 기다려보게. 내 또 한번 힘을 써볼 것이니 안도치: 자정원사 어른만 믿겠습니다 굽실거리는 안도치. 박불화: 그나저나 황후폐하께서 워낙......진귀한 패물을 좋아하시는 지라 입맛을 다셔보이는 박불화. 안도치:(좋아서) 우리 대군마님과 보탑실리 공주가 혼인만 할 수 있다면 그까짓 패물이 문제겠습니까 #강릉대군의 처소. 방 안(밤) 머리를 감싸쥐고 이리저리 피하는 안도치. 손에 닥치는대로 집어서 안도치에게 던지는 공민왕. 공민왕: 이제는 네 놈까지 나를 능멸해. 열 두 살의 어린 나이로 원에 볼모로 끌려와 몽골의 옷을 입고 몽골의 음식을 먹으며 살고 있는 것도 수치스러운데 이젠 나보고 몽골의 계집과 혼인을 하란 말이냐 안도치: 그런 것이 아니옵고 공민왕: 아니긴 뭐가 아니란 말이냐 이놈 접시를 집어 던지는 공민왕. 안도치의 이마에 맞는다. 피가 흘러내린다. 피는 닦을 생각도 않고 넙쭉 엎드리는 안도치. 안도치: 대군마님. 하루라도 빨리 고국으로 돌아가셔야 할 것이 아니옵니까 공민왕:(멈칫) 안도치: 태후마마께선 이미 오십이 넘으셨습니다. 행여 태후마마께서 변이라도 당하시면 임종도 못하신 불효를 무엇으로 감당을 하시겠습니까 공민왕:(신음)....... 엎드려 울고 있는 안도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소매 속에서 수건을 꺼내 안도치에게 던져준다. 그대로 엎드려 울고 있는 안도치. 공민왕: 누구라고 했느냐 안도치:(얼른 울음 그치고) 원나라 황실의 인척인 위안의 무남독녀 보탑실리 공주라고 하였습니다 공민왕: 보탑실리? 안도치: 대군마님께서도 한번 보신 적이 있으십니다. 황실 사냥터에서 쿤란태자와 함께 사냥을 하던 공민왕:...... 번개처럼 스치는 노구공주의 모습. - 땅에 떨어지는 화살. 말 위에 노국공주가 공민왕을 노려보고 있다. - 공민왕:(신음) 다시 스치는 노국공주의 모습. - 쿤란태자와 함께 말을 타고 가는 노국공주. - 공민왕:....... 안도치, 바닥에 떨어진 수건을 집어 이마의 피를 닦으며 어린애처럼 웃으며 일어나는 안도치. 안도치: 보탑실리 공주는 한 때 쿤란태자의 배필로 거론됐던 위안의 무남독녀입니다. 더욱이 원의 황실과는 인척간이니 대군께서 위안의 부마가 되신다면 누가 감히 대군마님의 앞길을 막겠습니까 공민왕: 이놈이 부르르 떨더니 벽으로 달려가 칼을 빼든다. 안도치: 아이구 대군마님 납작 엎드리는 안도치. 공민왕: 나더러 몽골의 주구가 되어 고려의 왕이 되라고 하는 게냐 칼을 움켜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공민왕. #명덕태후의 사저. 방 안(밤) 명덕태후: 몽골의 공주와는 혼인을 할 수 없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정세운:(난처) 명덕태후: 말씀을 해보세요 정세운: 대군께서는 백골이 되어 고려에 돌아오는 한이 있어도 몽골의 여인과는 명덕태후: 이런 답답한 일이 있나. 몽골의 공주면 원나라 황실의 인척이 아닙니까. 강릉대군의 부왕 되시는 충숙왕께서도 연경에 볼모로 끌려갔다 몽골의 공주와 혼인을 하는 바람에 만월대의주인이 되셨습니다 #동. 마당(밤) 혜비:.... 고개 숙이고 서있다. 명덕태후:(안에서) 오랑캐면 어떻습니까. 당장 혼사를 치르라고 하세요 가만히 눈물을 훔치는 혜비. 그런 혜비를 애처롭게 바라보는 김상궁. 안에서 정세운이 나온다. 눈물이 보일새라 얼른 자리를 피하는 혜비. #동. 방 안(밤) 명덕태후: 이 늙은이가 살면 얼마를 더 산다구. 어허 기가 막히다는 듯 탄식하는 명덕태후. #이제현의 사랑방. 안 이제현:(신음) 혜비를 바라본다. 고개 숙이고 마주앉은 혜비. 이제현: 그럴 수는 없지. 내가 무얼 바라고 그 먼 길을 오가면 강릉대군을 돌봐드렸는데 혜비: 아무 말씀 마세요 아버님. 제게 생각이 있으니 저한테 맡겨주세요 이제현: 강릉대군과의 혼사를 그만 두자 그 말이냐 혜비: 그럴 수는 없지요 이제현: 허면 혜비:(숙이는) 이제현: 허면 평생 수절이라도 하겠다는 거냐 혜비: 그것이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이제현: 그럴 수는 없다. 혼사도 치르지 않은 강릉대군을 위해 내 딸을 과부 아닌 과부로 만들 수야 없지 #대궐의 일각 수군거리는 관리들. 이제현이 온다. 귓속말을 멈추고 고개 돌리는 관리들. 이제현: 고얀지고 헛기침을 하고 가는 이제현. #동. 다른 일각 이제현, 온다. 김용과 조일신이 뒤쫓아온다. 김용: 익재대감. 그게 사실이옵니까 이제현: 뭘 말인가 조일신: 강릉대군께서 위안의 무남독녀와 혼인을 하게 됐다는 이제현: 나는 모르는 일일세. 어흠 퉁명하게 내뱉고 가는 이제현. 김용: 그런 소문이 파다하게 났거늘 대감께선 모르시는 일이다 그 말씀입니까 못들은 척 가버리는 이제현. 김용: 이거 큰 일이 아닌가. 강릉대군이 원나라 황실의 인척이 되면 조일신: 그런다고 별 수가 있겠나. 전하의 보령이 겨우 열 셋이신데 그 자릴 물려받으려면 강릉대군이 앞으로도 백 년은 더 살아야 할 것일세 김용: 허긴 웃으면서 불안한 김용. #희비 처소의 복도 최만생:...... 귀를 쫑긋하고 엿듣고 있는 최만생. 윤시우:(안에서)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제깐 놈이 무슨 재주로 개경으로 돌아오겠습니까 #동. 안 희비: 고려의 왕이 어디 왕입니까. 원나라 황실이 마음만 먹으면 윤시우: 염려마시래두요 대비마마 밖을 살피더니 바싹 다가앉아 귓속말을 건네는 윤시우. 희비: 그래요......원나라 황실의 역적의 딸이다...... 깔깔거리고 웃는 희비. #동. 복도 윤시우:(안에서) 기철의 동태만 잘 살피고 계시면 됩니다. 설령 기철이 강릉대군과 손을 잡아도 기황후의 환심만 사두면 전하의 자리는 반석과도 같을 겁니다 희비:(안에서) 나는 오라버니만 믿습니다 최만생:..... 엿듣더니 부리나케 달려나간다. #대궐의 일각 달려오는 최만생. 기철이 서성거리고 있다. 기철: 뭐라고들 하더냐 최만생: 아무래도 연경의 황후마마와 내통이 있는 듯 합니다 기철: 으응? 입을 실룩거리는 기철. “물럿거라. 도첨의 찬성사 대감 행차시다.” 윤시우가 채여를 타고 온다. 한껏 목청을 높이는 집사. 채여가 기철을 덮치듯 오는 바람에 겨우 옆으로 피하는 기철. 최만생이 부축한다. 시침 뚝 떼고 채여에 앉아 지나쳐가는 윤시우. 부들부들 떠는 기철. #기철의 집. 안방 기철:(엎드려) 어머니. 좀 일어나 앉아보세요 기철모:(누워서) 웬 소리를 그렇게 질러대냐. 에미 귀 안 먹었다 기철: 어머니. 우리 기씨 집안이 망하게 생겼어요 기철모: 기씨 집안이 망하게 생겼다니 (서둘러 일어나 앉으며) 누가 그런 소릴 해. 내 딸 년이 누군데. 원나라의 황후폐하가 아니시냐 기철: 원나라 황후면 뭘 합니까. 돈 갖다 주는 놈만 오냐오냐 하는데, 우리 기씨 집안은 빚 좋은 개살구지요 기철모: 저런 몹쓸 년을 봤나. 내 이 년을 당장 펄펄 뛰는 기철모(영안왕대부인). 그 모양을 보고 싱긋 웃는 기철. #기황후의 처소. 뜰 웃음소리들. 원순제의 소실들, 고관대작의 부인들과 시녀들이 모여 수다를 늘어놓고 있다. #동. 안 단정한 모습으로 앉아있는 기황후. 뒤쪽 장막에 의자를 놓고 앉아있는 노국공주. #동. 문 앞 여인들의 웃음소리. 공민왕을 부축해 오는 안도치. 숙취가 심한 지 얼굴은 부스스하고 옷매무새도 흐트러져 있다. 박불화:(나오며) 왜 이렇게 늦었는가. 황후폐하를 기다리게 하다니 대체 정신이 있는가 없는가 안도치: 죄, 죄송합니다. 오늘 아침에야 갑자기 전갈을 받고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도 박불화:....... 공민왕을 본다. 눈을 제대로 못 뜨고 건들건들 겨우 서있는 공민왕. 박불화: 어허, 이것 참 안도치: 자정원사 어른, 오늘 일을 내일로 하루만 미뤄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박불화: 들어가세 못마땅한 듯 공민왕을 흘키며 안으로 들어가는 박불화. 건들거리고 서있는 공민왕. 안도치: 정신을 바짝 차리셔야 합니다. 원나라 황실에서 대군마님께 큰 선물을 주신다고 하는데 공민왕:(눈 감은 채 안도치의 손을 뿌리치며) 이 놈 도치야, 날 어디로 끌고 가는 게냐 안도치: 몇 번이나 말씀을 올렸는데도 자꾸 이러시면 어떡합니까 대군마님 공민왕: 기황후께서 날 장갈 보내주시겠다.........? 안도치: 어서 안으로 드십시오 옷매무새를 고쳐준다. 공민왕: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구나 비틀거리며 안으로 들어가는 공민왕. 안도치: 조심하십시오 대군마님. 그러시다 넘어지시겠습니다 급히 따라 들어가는 안도치. #동. 뜰 비틀비틀 들어서는 공민왕. 공민왕을 부축하며 안절부절하는 안도치. 여인들이 수다를 멈추고 공민왕을 바라본다. 공민왕:...... 고개를 들어 둘러보더니 히죽 웃어보인다. 다시 높아지는 여인들의 수다. 그러자 아예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공민왕. 더욱 요란해지는 여인들의 수다. 그 모습 지켜보던 홍화가 입을 삐죽거린다. #동. 안 기황후:...... 빙긋이 바라본다. 공민왕:...... 눈을 뜨려고 애쓰며 겨우 서있다. 기황후: 지난 밤에 과음을 하셨나보네 공민왕: 지난 밤에 마신 술은 다 깼사옵고 아침에 해장 술을 마신 것이 그만 꺼덕꺼덕하는 공민왕. 기황후: 저런 그러다 쓰러질라 공민왕: 심려치 마시옵소서 마마. 소인은 냇가에 늘어진 수양버들처럼 꺾일 듯 꺾이지 않고 쓰러질 듯 하면서도 잘도 서있습니다 기황후: 그래? (웃으며) 그것 참 신통하시네 깔깔거리고 웃는 기황후. 꺼덕꺼덕거리며 두 눈을 감고 고개를 푹 숙이는 공민왕. 장막 뒤의 노국공주. 노국공주:...... 장막사이로 공민왕의 모습이 보인다. 흠칫하는 노국공주. 다시 장막 밖을 훔쳐보는 노국공주. 공민왕이 공손히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는 모습이 보인다. 공민왕: 황후폐하의 분부시라면 열길 불길 속이라도 기꺼이 뛰어 들겠습니다 술이 덜 깬 듯 휘청거리며 웃어대는 공민왕. 노국공주:..... 기억을 더듬듯. - 연경의 고려촌 술집 앞에서 사내들에게 봉변을 당하고 있던 공민왕의 모습 - 노국공주:....... 입을 꼬옥 다무는 노국공주. #연경 부근의 숲 노국공주가 탄 말이 달려와서 급히 멎는다. 하늘 높이 뛰어오르는 말발굽. 공민왕:...... 이미 와서 말의 목덜미를 쓰다듬어주고 있는 공민왕. 노국공주:(가뿐 숨 몰아쉬며) 꿈도 꾸지 말아요. 당신 같은 사람하고는 결혼 못하니까 공민왕:...... 말의 목덜미만 만지고 있는 공민왕. 노국공주: 지금 당장 기황후를 찾아가서 다른 여잘 골라달라고 부탁을 하세요 말고삐를 나꿔 채 돌아서는 노국공주. 공민왕: 목마른 자가 먼저 우물을 판다는 속담이 있소이다 노국공주:.... 훽 돌아서는 노국공주. 공민왕: 급한 건 내가 아니라 공주가 아니오. 사랑하는 사람과 아버지를 살려야 하니 말이오 노구공주:......(파르르) 공민왕:(싱긋 웃으며) 나 역시 몽골 여자와 결혼하고 싶은 마음은 없소이다. 비록 눈이 하나 밖에 없는 외눈박이라고 해도 나는 고려 여자를 부인으로 맞을 거요 말고삐를 나꿔채 천천히 말을 몰아 돌아가는 공민왕. 노국공주:........ 모멸감에 떨고 있는 노국공주. #노국공주의 처소. 방 안(밤) 불안해서 보고 있는 홍화. 미친 듯이 방 안을 서성이는 노국공주. 홍화: 공주마마 노국공주: 어디에 붙어있는 지도 모르는 변방의 하잘 것 없는 왕족이 나를 모욕해. 거기다 주정뱅이 주제에 홍화: 오히려 잘됐지 않습니까 공주마마. 고려의 왕자가 공주마마를 싫다고 하는데 기황훈들 어떡하겠습니까 노국공주:(버럭) 날 모욕했다고 하질 않느냐 #동. 뜰(밤) 남장으로 갈아입고 나오는 노국공주. 홍화:(따라나오며) 어딜 가십니까 공주마마 노국공주: 너는 따라올 거 없다 씨근거리며 달려가는 노국공주. #고려촌의 술집. 안(밤)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노국공주. 노국공주:...... 흠칫 멈추더니 놀래서 안을 둘러본다. 공민왕 혼자 앉아있다. 노국공주:...... 공민왕:..... 노국공주: 원의 볼모로 끌려온 변방의 왕자라기에 마음 속으로 측은히 여겼더니 교활하기 그지없는 자로군 공민왕:....... 노국공주: 날 모욕한 건 내 발로 찾아오게 만들려는 속셈이었구..... 공민왕: 나나 공주나 마음에 없는 결혼을 하기는 마찬가지요 노국공주:....... 공민왕:...... 앞에 놓인 두 개의 술잔을 가리킨다. 공민왕: 술잔 하나엔 독이 들었소이다 노국공주:...... ‘두 개의 술잔’ 공민왕: 어느 잔을 고르리까 노국공주:........ 흠칫하는 노국공주. 지긋이 노국공주를 바라보는 공민왕. 점점 약이 오르는 노국공주. 망설이다가 오른쪽 술잔을 가리킨다. 공민왕: 내가 독이 든 술잔을 피하면 운명이라고 생각하시오 오른쪽 술잔을 집어 단숨에 마셔버리는 공민왕. 비웃듯 바라보는 노국공주. 술잔을 내려놓는 공민왕. 노국공주:......(숨이 막힌다) 공민왕:.... 문득 싱긋 웃는다. 순간 노국공주가 성큼 다가가더니 남은 술잔을 집어 든다. 당황해서 그 손을 꽉 움켜잡는 공민왕. 노국공주: 이 잔에도 독이 들어 있지 않다면 날 속인 것이니 당신과 결혼할 수 없고, 만약 정말 독이 들어있다면 당신을 의심한 죄값을 달게 받을 것입니다 공민왕의 손을 부리치려는 노국공주. 그 손을 더 꽉 움켜쥐는 공민왕. 식은땀이 흐르는 공민왕. 그런 공민왕을 비웃듯 노려보는 노국공주. <신돈 7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