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언제 어떻게 벌어질지 모를 상황에 대비해, 핵심인물(대부분은 출연 연예인과 친분이 돈독한 사이다) 몇 명에게는 그 때 그 때 지시사항을 전달받을 수 있도록 무전기까지 장착한다. 준비는 완벽하게 됐고, 이제 오늘의 주인공인 탤런트 홍길동이 등장한다. 이제 핵심인물들과 모든 엑스트라들은 이 몰래카메라를 총지휘하는 감독의 지시에 따라 아주 자연스럽게 ‘사건'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감독이 물컵을 떨어뜨리라고 하면 물컵을 떨어뜨리고, 큰소리로 싸움을 하라고 하면 싸움을 한다. 그리고 핵심인물들은 감독이 지시하는 대로 동작을 취하고 때로는 대사를 따라서 읊기까지 한다.
위 ‘몰래카메라' 프로그램을 머릿속에 잘 그려두자.
그러면 지문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만약 당신이 위 프로그램의 PD라고 하자. 그럼 이제부터 당신은 헤드폰을 머리에 쓰고, 다양한 각도로 잡은 몰래카메라를 확인하면서 엑스트라와 조연들에게 지시를 시작한다. 자, 오늘 몰래 카메라의 주인공 홍길동이 등장한다.
“홍길동이 들어오면 웨이터가 부딪치면서 물을 홍길동의 옷에 쏟아 부어. 그리고 죄송하다고 하면서 얼른 들고 있는 행주로 옷을 닦아줘. 그런데 오히려 옷에 김칫국물이 더 묻어나는 거지. 그럼 다시 죄송하다고 인사하면서 이 사실을 주인이 알면 자기는 짤리니까 한 번만 봐달라고 애원을 해. 그리고 나서 홍길동이 자리에 오면 여자 웨이터가 의자를 밀어주는 척하면서 빼. 그래서 홍길동이 바닥에 쓰러지면, 두 손가락을 볼에 갖다대면서, ‘저 귀엽죠?'하면서 깜찍한 표정을 지어····”
위의 모든 지시사항들 중 대사를 제외한 모든 것이 ‘지문'이다. 즉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지시하는 모든 것들이 바로 지문인 것이다. 왜 지시사항이라고 했느냐하면, 그 지문을 보고 감독과 배우는 물론이고, 촬영, 조명, 미술, 의상, 분장, 미용, 특수 효과 등등의 스텝들이 준비를 하기 때문이다. 위 내용을 극본 형식으로 바꿔보겠다.
#1. 레스토랑. 안
홍길동이 들어온다. -------------- ①
임꺽정을 찾으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그만 웨이터와 부딪친다. ---------①
웨이터:(얼른 고개 숙이며 ------②) 죄송합니다, 손님
홍길동:(본다------②)
옷이 다 젖었다.
웨이터: 죄송합니다. 제가 한눈을 팔다 그만.....알른 닦아드리겠습니다
홍길동: 괜찮아요. 많이 안 젖었는데요 뭘 (웃어보인다 --------②)
웨이터, 쟁반에 있던 냅킨으로 홍길동의 옷을 닦아준다. --------①
홍길동의 옷에 김치국물이 번진다. ----------③
웨이터:(더 놀라서 홍길동을 보며) 이거 죄송해서 어떡하죠. 테이블 닦은 행준 걸 모르고....정말 죄송합니다
홍길동:(보더니 웃으며------②) 좋은데요 뭘. 붉은 꽃무늬도 들어가고.....
웨이터:(연신 허리 숙이며) 죄송합니다. 제가 들어온 지 얼마 안 됐는데 계속 실수만 하고 있거든요. 제발 사장님께는 비밀로 해주십시오
홍길동: 알았어요. 걱정 말고 가보세요
웨이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연신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도망치듯 간다.
홍길동:.....
옷을 한 번 더 쳐다보더니 씩 웃고 자리로 간다.
‘지문'은 ‘대사'를 뺀 나머지 모두이다. 그 말은 연기자들의 목소리(대사)를 제외한 화면에서 보이는 모든 것이 ‘지문'이라는 말이다. 그럼 화면에 보이는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 제일 먼저 배우들의 운동선과 동작이다. 배우들이 언제 들어와서 어디에 앉으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운동선을 설명해주어야 하는데, 위 대본 중 ①에 해당하는 부분들이다. 그리고 배우들의 미세한 동작이나, 감정 등도 써주어야 한다. ②에 해당하는 부분들이다. 사건의 전개와 결과를 시청자에게 확실히 보여줄 필요가 있을 때, 카메라가 잡아야 할 대상이나 ‘클로즈업' 등을 지정해준다. ③의 경우이다.
①과 ②의 차이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위의 대본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1. 레스토랑. 안
홍길동이 들어온다. -------------- ①
임꺽정을 찾으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그만 웨이터와 부딪친다. ---------①
웨이터:(얼른 고개 숙이며 ------②) 죄송합니다, 손님
홍길동:(본다------②)
옷이 다 젖었다.
위 대본에서 작가는 홍길동이라는 배우에게 세 가지 지시사항을 내렸다. 하나,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와라. 둘,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웨이터와 부딪쳐라. 셋, 물에 젖은 자신의 새 양복을 보라. 똑같이 배우에게 행동을(대사가 아니라) 제시한 것인데 ①과 ②는 어떻게 다르단 말인가? 거칠게 얘기하면, ①은 카메라 감독에게 이런 장면을 찍어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고, ②는 배우에게 이런 연기를 해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①은 카메라를 통해 화면에 보여지는 장면이고, ②는 배우의 연기를 통해 보여지는 장면이다.
①과 ②의 차이를 잘 이용하면, 지문을 아주 간결하고 짧게 쓸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액션씬의 경우다. 주인공과 악당이 싸움을 하는 장면이다. 정석대로 쓰자면 다음과 같이 써야 한다.
산적:(칼을 내리친다)
홍길동:(칼로 막아낸다)
산적:(다시 내려친다)
홍길동:(다시 막아낸다)
산적:(발로 홍길동의 배를 걷어찬다)
홍길동:(바닥으로 나뒹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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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②의 지문 사용에 의한 표기다. 그러나 액션씬을 이렇게 쓰다보면 분량이 엄청나게 늘어난다. 이럴 경우 ①의 사용법에 의해 다음과 같이 표현하면 아주 깔끔한 대본이 될 수 있다.
산적과 홍길동의 싸움이 벌어진다. 치열하다. 산적의 내려치는 칼마다 맞받아치는 홍길동. 그리고 결국 홍길동의 칼이 산적의 배를 가른다. 산적이 피를 토하며 쓰러진다.
요즘처럼 ‘무술감독'이 따로 액션장면을 찍는 상황에선, 이 정도로만 써주는 게 우리가 예상했던 화면보다 더 멋진 화면으로 나올 수 있게 하는 방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