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제1장>
시체실. 덜커덩-. 금속성 문열리는 소리와 함께, 열린 문 사이로 떨어지는 조명. 연심이 형사에게 밀려 등장.
[연심] '새간디, 새두 아닌것이 날긴 으떻게 난디여. 지가 뭐간디. 으떻게 난디여.'
[형 사] '확인 하시요.'
[연 심] '뭘 말에유'
[형 사] '당신 남편인가 아닌가'
형사 무엇인가 홱 들치는 시늉. 관위에 누워있는 주현의 시체. 객석 쪽으로 늘어진 손. 연심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형 사] '확인하시오'
[연 심] '(무조건 끄덕인다)'
[형 사] '당신 남편이 틀림없오?'
[연 심] '(끄덕이고 또 끄덕인다)'
[형 사] '대답을 해봐. 당신 남편인가 아닌가.'
[연 심] '몰라유. 몰라유 몰라유. 난 몰라유'
[형 사] '보란말야 얼굴을'
형사 연심을 홱 끌어당겨 시체쪽으로 미는 시늉. 연심 비명을 지르며 물러나려고
허우적거리다가 주저앉는다.
[연 심] '(울음)병신. 죽긴 왜 죽어. 지가 뭔데 지 맘대로 죽는거여.죽기는'
관 위의 시체와 그 손과 울고 있는 연심.
[주 현] (소리)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나는 유쾌하오. 이런 땐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굿바이---육신이 흐느적 흐느적하도록피로했을 때만 정신이 은화처럼 맑소. 니코틴이 내 회배 앓는 뱃속으로 스미면 머리속엔 으례히 백지가 준비되는 법이오. 그 위에다 난 위트와 파라독스를 바둑 포석처럼 늘어놓소. 가증할 상식의 병이오. 굿바이--- 그대는 이따금 그대가 제일 싫어하는 음식을 탐식하는 아이러니를 실천해 보는 것도 좋을 것같소. 위트와 파라독스와--- 테입이 끊어지면 피가 나오. 상채기도 머지않아 완치될줄 믿소. 굿바이---
여왕봉과 미망인. 세상의 하고 많은 여인이 본질적으로 이미 미망인 아닌 이가 있으리까. 아니 여인의 전부가 그 일상에 있어서 개개 미망인이라는 내 논리가 뜻밖에도 여성에 대한 모독이 되오? 굿바이---
조명 어두워 진다.
[장] <제2장>
법정이다. 피고인 석에 연심이 서 있다. 무표정하게 심심해 하는 아이처럼. 판사가 서류를
뒤적이더니
[판 사] '이름은?'
[연 심] '연심이여'
[판 사] '나이는?'
[연 심] '스물 셋이여'
[판 사] '내가 묻는 말엔 경어를 쓰도록'
[연 심] '경어가 뭔데유?'
[판 사] '어른이 물을 땐 그렇습니다. 또는 아닙니다. 그렇게 대답하지 않는가?'
[연 신] '기분이 좋을 때는 그래유'
[판 사] '그러니까 내가 묻는 말에도 그런식으로 대답하라 그 말이야'
[연 심] '(중얼대듯) 지금 기분이 썩 안좋구만요'
[판 사] '직업은 뭔가?'
[연 심] '자유업이유'
[판 사] '자유업이라면?'
[연 심] '그러니까 그게 자유업이지유. 먹고 자고 벌고 하는게 순전히 지 자유니까유'
[판 사] '김주현이가 누군지 아는가?'
[연 심] '그걸 왜 몰라유 삼년이나 같은 집에서 살었는데'
[페이지] 002
[판 사] '남편이란 말이지?'
[연 심] '그 쓸개 빠진 작자가 남편은 무슨 얼어 죽을 남편이여'
[판 사] '피고인은 그렇다 아니다만 대답해'
[연 심] '아녜유'
[판 사] '삼년이나 같이 살았다면서'
[연 심] '(의아해서) 같이 살면 다 남편인가유'
[판 사] '정식으로 결혼한건 아니란 말이지?'
[연 심] '남편구실을 해야 남편이지유, 그건 인간두 아녀'
[판 사] '어째서?'
[연 심] '인간이 오죽 못나 빠졌으면 죽었을라구요. 이년 가슴에 못을 치구 말여'
[판 사] '피고인은 김주현이가 살해당한게 아니고 자살한 거라고 주장하는건가?'
[연 심] '그건 아무래도 좋아유. 허지만 지 생각에는 이 시상살이란게 다 그저 그렇구 그런 것이지만서두 그렇다구 모질게 지 목숨을 끊어서야 쓰것냐 그말에유'
[판 사] '그러니까 내말은, 피고인이 김주현이는 살해당한게 아니라 자살한 거라고 주장하는게
아니냔 말야?'
[연 심] '그건 그래유'
[판 사] '자살이란 말이지?'
[연 심] '하지만 지가 죽인거나 매일반에유'
[판 사] '대답을 분명히 해. 그런가 안그런가?'
[연 심] '쥑인 것이나 매일반이라니까유'
[판 사] '그렇다 아니다만 대답하라니까'
[연 심] '굳이 그렇게 뚝 부러지게 골라 잡아야 한다면 할 수 없지유. 쥑였어유'
[판 사] '동기는 뭔가?'
[연 심] '뭐가유?'
[판 사] '왜 김주현이를 살해했는가 그말야'
[연 심] '글쎄유 잘 모르겠구만유'
[판 사] '별다른 이유도 없이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단 말인가?'
[연 심] '글세 모르것시유. 정말 모르것시유'
검사가 안경을 고쳐 쓰며 일어선다.
[검 사] '남편의 직업은?'
[연 심] '신통한 재주가 있어야지유?'
[검 사] '집에서 놀았단 말이지?'
[연 심] '예'
[검 사] '그럼 생계는 피고인이 해결했단 말이군'
[연 심] '그 사람보다는 제가 버는게 휠씬 더 수월하니까유'
[검 사] '어째서?'
[연 심] '요즘 세상이 그렇잖아유? 여자야 지 맘만 모질게 먹으면 돈벌기쉬워유'
[검 사] '피고인은 무슨 일을 해서 돈을 벌었나?'
[연 심] '일은 무슨 일예유. 술파는 일이지'
[검 사] '술만 팔았나?'
[변호사] '재판장. 이의 있습니다'
[판 사] '인정합니다'
[검 사] '피고인은 자기 직업에 대해서 죄의식을 느끼진 않았나?'
[연 심] '그게 무슨 말에유?'
[검 사] '말하자면 먹고 살기 위해선 무슨일을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했느냐 그말이요?'
[연 심] '배고픈 설움 누가 알어준대유'
[검 사] '김주현이를 사랑했나?'
[연 심] '사랑이 밥 먹여 준대유. 그게 무슨 상관에유'
[검 사] '그런데 왜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김주현이와 동거를 계속했나?'
[연 심] '그런걸 어떻게 말류 설명해유'
[검 사] '그런 생활이 더 지겹지 않았나?'
[연 심] '아네유. 재밌었어유'
[검 사] '재밋다니?'
[연 심] '그 사람 꼭 어린애 같었어유. 장난꾸러긴 걸유. 저두요 겉으로내어서 말은 안했지만 그 사람을 얼마나 좋아했다구요'
[검 사] '그런데 왜 죽였나'
[연 심] '예?'
[검 사] '궁핍한 생활 때문에'
[연 심] '아네유'
[검 사] '그 사람이 갑자기 싫어졌나?'
[연 심] '아네유'
[검 사] '피고인에게 딴 남자라도 생겼나?'
[연 심] '아네유'
[검 사] '그럼 무엇 때문에 김주현이를 살해했느냐 그말야'
[연 심] '아네유, 아네유, 아네유. 그런게 아니라니깐유, 모르면 가만이나 있어유'
[검 사] '아니긴 뭐가 아냐. 피고인이 김주현이를 미쓰꼬시 옥상으로 유인 아래로 밀어서 떨어뜨려 죽인게 사실이 아니란말야'
[변호사] '재판장!'
[판 사] '인정합니다'
[페이지] 003
증인석에 남자가 나와 앉는다.
[검 사] '직업이 뭡니까?'
[남 자] '글쎄요, 그런 거 까지 밝혀야 합니까'
[검 사] '좋습니다. 증인은 피고인의 집에 자주갔었나요'
[남 자] '비교적 그런 편입니다'
[검 사] '무엇에 비교해서 말입니까?'
[남 자] '얼마전에 사업에 실팰했었습니다. 그때 연심일 만났죠. 잘 해줬어요. 그 덕분인진 모르지만 요즘은 꽤 일이 잘 풀려 나가는 셈이죠'
[검 사] '피고인에게 돈을 준 적이 있나요?'
[남 자] '물론입니다'
[검 사] '피고인이 돈을 요구했나요?'
[남 자] '아닙니다'
[검 사] '그런데 왜 돈을 줬나요'
[남 자] '난 여자에겐 돈을 줍니다. 여자라면 누구에게나 다 돈을 줍니다. 그정도 체면은 차리고 살 정도의 여유는 있습니다'
[검 사] '허지만 어떤 일의 대가로 주는 거겠죠'
[남 자] '당연한 게 아닐까요'
[변호사] '재판장'
[검 사] '난 피고인의 매춘행위에 대해서 따지고 있는게 아닙니다. 피고인은 간통을 범했습니다.
더구나 그 간통의 대가로 돈까지 받았습니다'
[변호사] '간통과 매춘이 동시에 성립될 수 있단 말입니까'
[검 사] '그러니까 그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 보자는 겁니다'
[판 사] '계속 하시오'
[검 사] '증인이 피고인의 집에 갔을 때 김주현이도 있었나요?'
[남 자] '없었습니다'
[검 사] '방을 비워줬단 말인가요?'
[남 자] '글쎄요 잘은 모르겠읍니다만 아마 그럴 수 밖에 없었겠죠'
[검 사] '피고인과 김주현이가 심하게 다투는 걸 목격하셨다는데'
[남 자] '네'
[검 사] '그게 언제 였습니까'
[남 자] '지난 봄이던가요?'
김주현 어슬렁 등장. 집안을 기웃거린다.
[남 자] '아시겠지만 삼십삼번지의 그 집은 대문을 들어서면 긴 마당 양켠으로 방들이 쭈욱 늘어 서 있읍니다. 그 방마다 명함이나 종이 쪽지가 문패대신 붙어있죠. 저 여자의 방에도 그런 문패가 붙어 있었는데 거기엔 심연심이라고 써 있었지 김주현이란 이름은 없었습니다. 난 그때까지 저 여자에게 남편이 있었다고는 생각지 않었습니다. 아니 남편이 있든 없든 나하곤 상관이 없었고 귀찮게 스리 그런데까지 신경을 쓰고 싶지도 않었습니다. 하여간 막 일을 벌리려는 그 순간이었습니다. 갑자기 방문이 열렸죠'
[장] <제3장>
방문앞에 망서리고 서 있는 김주현. 여자의 고무신이 가즈런히놓여 있다. 안심하고 방문을
연다. 순간 놀래서 후다닥 떨어지는 연심과 남자.
[주 현] '미안합니다. 방문을 잘못 열었읍니다'
[남 자] '뭘봐, 문닫어'
[주 현] '실례했읍니다'
문 닫으려는데
[연 심] '또 어딜 갈려구'
[주 현] '---'
[연 심] '못 들어와'
[주 현] '(남자에게) 실례합니다. 더 이상---네. 갈 곳이 없습니다. 더이상은 서 있을 수가 없어요. 미안합니다'
주현 신발을 벗어 두손에 들고 안으로 들어간다. 옆 방으로 고개를 푹 숙으리고 들어가 누워버린다.
[연 심] '가세유'
[남 자] '지금?'
[연 심] '예, 빨리유'
[남 자] '애만 태워놓고 그냥 가란 말야'
[연 심] '그걸 내가 알게 뭐에유, 일이 생겼은게 빨리 가유'
[남 자] '무슨 일인데'
[연 심] '뭔 남자가 이렇게 치근치근한가'
옷가지를 남자에게 안겨준다.
[남 자] '(옷걸치며) 누구냐!'
[연 심] '별걸 다 묻네'
[남 자] '서방이냐'
[연 심] '지랄'
남자를 밀어낸다.
[남 자] '나, 옷이나 입구'
[연 심] '빨리 나가유'
밀어내고 문 꽝 닫는다.
[페이지] 004
[남 자] '이런 제기랄. 돈이나 돌려줘'
연심 문 열더니 남자의 구두짝을 홱 팽개친다. 남자 투덜거리며 행색을 차리는데 연심, 옆방으로 들어가 주현을 노려본다.
[연 심] '워디 갔었냐?'
[주 현] '---'
[연 심] '대답해봐. 워디가서 처박혔다 인제 들어오느냐 말여. 워떤 년하고 재미보다가---'
[주 현] '---'
[연 심] '아, 이 인간아 왜 말을 못혀, 사람 속터지게'
주현의 멱살을 잡아 일으킨다.
[연 심] '이틀씩이나 워디 처박혔다 오느냐 말여'
[주 현] '난 돌아다녔어'
[연 심] '어딜'
[주 현] '여러 군델 갔었지'
[연 심] '어디 어디'
[주 현] '그저 헤메고 다녔지'
[연 심] '뭐여 헤메고 다녀? 그것두 말여? 잠은 어디서 자고'
[주 현] '공원에서 잤지'
[연 심] '하이고 네가 다람쥐 새끼냐, 공원에서 잠을 자게. 새빨간 거짓말여. 바른대로 안대면 너죽고 나죽을 판이여. 대라고, 바른대로 대라고 워딴 년인가 워떤 년하고 놀아났는가'
주현의 멱살을 쥐고 흔드는 연심. 조명 어두워지고 주현의 울음소리. 기묘한 울음소리가 마치 비명처럼 퍼지다가.
[장] <제4장>
법정.
[검 사] '그날밤 남편을 심하게 구타했다던데?'
[연 심] '좀 때렸어유'
[검 사] '남편은 맞고만 있었나?'
[연 심] '그럼 지가 한 짓이 있는데 어쩌겠어유'
[검 사] '피고인이 구타하는대로 남편은 가만히 있었단 말인가?'
[연 심] '가만있긴유'
[검 사] '그럼'
[연 심] '울었어유'
[검 사] '울어?'
[연 심] '섧게 울었어유'
[검 사] '그래서?'
[연 심] '그래 가만히 생각해 보니 사는게 어찌 이모양으로 처량한가 싶어서 그냥 지 방으로 건너와 버렸어유'
[검 사] '그뿐인가'
[연 심] '지 방에 건너와서 저두 좀 울었어유'
[검 사] '분해서?'
[연 심] '아네유'
[검 사] '그럼'
[연 심] '그 사람이 측은해서 말에유'
[검 사] '왜 남편하고 싸웠나? 남편한테 딴 여자가 생겼나?'
[연 심] '아네유'
[검 사] '어떤 여잔지 대라고 소리쳤다면서?'
[연 심] '그건 그냥 한번 그래본것 뿐에유'
[검 사] '피고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김주현이가 다른 여자를 봤기 때문에 분해서 싸운 것이 아니란 말인가?'
[연 심] '아네요. 그럴 사람은 아네유'
[검 사] '어째서 그렇게 믿지?'
[연 심] '그러니까 같이 사는거 아네유?'
이상하다는 듯이 검사를 쳐다본다.
[변호사] '김주현이와 처음 만난건 언젭니까?'
[연 심] '한 삼년됐어유. 지 고향에서'
[변호사] '어떻게 만났죠?'
[연 심] '지가 일하는 술집에 자주 왔어유. 그 사람이 몸이 아파서 온천에 쉬러 온거래유. 가끔 피를 토하고 그러드구만유. 그런대두 늘상 그놈의 술을 왠수처럼 퍼 마셔 대는거에유. 그래서 지가 보다못해 충고 비스듬히 몇마디 했더니 그게 그만 인연이 돼서---'
[변호사] '동정심을 느꼈나요?'
[연 심] '아네유 저 같은게 누굴 동정하구 말구가 있나유? 서로 외롭고 허전하니까 기대이면 좀 나을까 싶어서 그런 것 뿐이지유'
[변호사] '남편을 사랑했습니까?'
[연 심] '그게 그렇게 문제가 되나유. 이미 그 사람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데 지금 그걸 새삼스레 자꾸 따져 무슨 소용이에유?'
[변호사] '피고인은 지금 피고인이 무슨 혐의로 이 법정에 서 있는가를 알고 있습니까?'
[연 심] '예, 살인죄라면서유'
[변호사] '그럼 대답해 주십시오. 남편을 사랑했습니까?'
[연 심] '예, 허지만 사랑하고 안하고가 중요한건 아네유'
[변호사] '어째서죠?'
[연 심] '그 사람은 날고 싶어 했거든요'
[변호사] '날고 싶어 하다뇨?'
[연 심] '저두 그렇구요. 그사람 나하고 하늘 위로 훨훨 날고 싶어 했다니까요 날개가 다 자라면유'
[페이지] 005
[변호사] '날개가 다 자라면?'
[연 심] '예'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방안에 한줄기 햇빛. 거기에 쪼구리고 앉아 돋보기로 휴지를 태우고 화장대위에 화장품들을 장난감처럼 만지작거리는 주현.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아본다.
[연 심] '허구헌날 집에서 잠만 잤어유. 그러니 심심두 했을 것이여. 먼잠이 그렇게 많은가. 꿈두 안꾸는가? 무서운 꿈 말여. 난 밤만 되면 식은 땀이 흐르는디. 가위 눌려서 말여. 그러니 날개가 돋지. 죽은 사람처럼 누워만 있으니 날개가---'
[장] <제5장>
주현, 연심의 화장품으로 열굴에 화장을 하기 시작한다. 거울을 보고 여자들의 표정을 지어 보이며 히죽 웃기도 하고--- 머리에 수건을 쓰기도 한다. 거기에.
[연 심] '(소리) 하루 종일 뭘해? 잠만 자나?'
[주 현] '(소리) 궁릴하지'
[연 심] '(소리) 무슨 궁리?'
[주 현] '(소리) 발명도 하고 논문도 쓰고 그리고 시도 쓰구'
[연 심] '(소리) 그런건 해서 뭘해'
[주 현] '(소리) 심심하니까. (괴로운 웃음소리)'
연심이가 들어온다. 백에서 은화를 꺼내 던져준다. 날새게 은화를 받아 햇빛에 비춰보는 주현.
연심이 퇴장.
[주 현] '(소리)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육신이 흐느적 흐느적 하도록 피로했을 때만
정신이 온화처럼 맑소--- 굿바이---위트와 파라독스와--- 굿바이---'
[장] <제6장>
법정.
[검 사] '남편한테 돈을 줬나?'
[연 심] '예, 하루에 오십전짜리 은화 한 개씩 줬어유'
[검 사] '남편은 외출도 안 한다면서 그 돈은 어디다 쓰지?'
[연 심] '저금을 했어유. 내가 벙어리 저금통을 하나 사다 줬거든유.그속에 돈이 꽤 모였어유.
그래서 짤랑짤랑 흔들어 보고는 좋아하곤 했어유. 그런데---'
[검 사] '그런데?'
[연 심] '하루는 그 벙어리 저금통이 없어졌겠지유. 어쨌냐니까 버렸대유. 글쎄 그걸 변소에다
갖다 버렸대지 뭐에유, 그사람은 돈 쓸 줄두 몰라유'
[검 사] '계획적으로 남편한테 돈을 준게 아니구?'
[연 심] '네?'
[검 사] '남편이 외출을 해주는게 피고인에겐 편리했을 테니까'
[연 심] '왜유?'
[검 사] '남편이 있는 방에 손님을 데려올 순 없을테니까'
[연 심] '그건 안 그래유'
[검 사] '어째서?'
[연 심] '상관없는 일이니까유. 손님이 와도 그 이는 웃방에서 소리 없이 잘 놀았어유'
[검 사] '화를 낸 적두 없단 말이지?'
[연 심] '예'
[검 사] '자기 부인이 외간 남자와 놀아 나는데두?'
[연 심] '그게 뭐 잘못인가유'
[검 사] '뭐라구?'
[연 심] '사람은 다 마찬가지 아네유'
[검 사] '그건 무슨 뜻인가?'
[연 심] '그저 그렇다는 거지유'
[검 사] '허지만 그사람 빼놓곤 지 마음까지 준 사람 없어유. 하늘에 두고 맹세해유. 마음만은 안줬어유. 눈꼽만치도 정말에유'
[검 사] '계획적으로 남편을 외출시킨게 아니란 말이지?'
[연 심] '지가 뭣 땜에유'
[장] <제7장>
기적소리-. 기차시간을 알리는 아나운서 멘트. 주현이 들어온다. 서성이다가 구석 자리에 앉는다. 웨이터가 와서 메뉴를 내민다. 무심히 메뉴를 훑어가는 주현.
[웨이터] '뭘루 드시겠습니까?'
주현 갑자기 메뉴를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며 무슨 말인가 하려다 싱겁게 웃는다.
[주 현] '내 어릴때 친구 이름같군'
[웨이터] '네?'
[주 현] '여기 써있는 글자들 말야'
[웨이터] '아 네'
[주 현] '눈 앞에서 가물거리는군. 지금은 기억도 희미하지만--- 나하곤 이젠 상관없는 이름들이지'
[웨이터] '어릴 때 친구 말입니까?'
[페이지] 006
[주 현] '아니 여기 적힌 음식 이름들 말야'
[웨이터] '말씀도 재미있게 하시는군요'
[주 현] '재밌다구? 재밌어'
[웨이터] '전 손님이 오시는 날을 기다리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오실때 마다 재밌는 말들을 하시니까요'
[주 현] '그건 이상한데, 난 하나두 재밌지가 않어'
[웨이터] '그래요? 그건 참 안됐군요'
[주 현] '상관없어. 자네가 나 몰래 재미 좀 본다고 해서 죄의식을 느낄필요는 없지. 그보다 더한 재미도 몰래 보는 사람이 있는데'
[웨이터] '그 행복한 사람은 누굽니까?'
[주 현] '우리 마누라'
[웨이터] '네?'
[주 현] '허긴 그 반대인지도 모르지. 재밀보고 있는건 우리 마누라가 아니라 난지도 몰라. 그래 그건 아무도 장담할 수가 없지. 안 그런가?'
[웨이터] '글쎄요 (웃는다)'
[주 현] '아, 그런데 지금 몇시지?'
[웨이터] '열한시 좀 됐을 겁니다'
[주 현] '미안 하지만 시계 좀 봐 주시겠오?'
[웨이터] '열한시 오분이군요, 자 보십시오'
[주 현] '열한시 오분이라--- 틀림없이 맞겠지'
[웨이터] '오초쯤 틀릴까요? 그정도 틀려도 안되겠습니까?'
[주 현] '---'
[웨이터] '(웃으며) 안심하십시오. 기차하고 맞춘시간이니까요'
[주 현] '그럼 --- 정확하겠군'
[웨이터] '열두시 되려면 아직 한시간 남았습니다'
[주 현] '열두시?'
[웨이터] '손님이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죠'
[주 현] '집? 집이라---'
[웨이터] '왜요? 집이 없으십니까?'
[주 현] '---'
[웨이터] '미안합니다. 농담이었습니다'
[주 현] '농담? 농담이면 곤란하군, 때로는 농담이 사람두 죽이는데'
[웨이터] '그런데 매일밤 여길 찾아오시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누굴 기다리시는 것 같지는 않구 말입니다'
[주 현] '저 사람들이 부러워선가 보지?'
창 밖을 가리킨다
[주 현] '여행을 떠나고 돌아오고 하는---'
[웨이터] '그럼 손님도 여행을 떠나시죠? 어려운 일은 아니잖습니까?'
[주 현] '내겐 어려운 일이지'
[웨이터] '여행이란 원래 마음 먹었을때 훌쩍 떠나는거 아닌가요? 이 세상 모든 여행이---'
[주 현] '그렇군, 허지만 난 아직 떠날수가 없어'
[웨이터] '왯니까?'
[주 현] '(중얼거리듯) 날개가--- 날개가 아직---'
(멍하니 창 밖을 보는 주현)
[웨이터] '뭐라구. 뭐라구 그러셨죠?'
[주 현] '날개가--- 날개가---'
기적소리가 그의 말을 삼킨다.
[장] <제8장>
법정.
[검 사] '김주현이는 자주 왔나요?'
[웨이터] '그렇진 않습니다. 한 일주일에 한번 정도--- 허지만 조심해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 손님이었죠'
[검 사] '그날 얘길 해 주시오. 김주현이가 기절을 했다구요?'
[웨이터] '네. 그러던 어느날 이었습니다. 영업이 막 끝난 시간이 었는데 문을 닫으려고 하다가 보니--- 그 사람이 유리문 밖에 우두커니 서서 이 쪽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웬일이세요?
이렇게 늦게 들어오시죠" 그랬더니 아무말 없이 저를 한동안 쳐다보더니 고개를 가만힌 젓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곤 무슨 말인가 하려는 듯 애타게 저를 쳐다 보더군요. 그때 제가 문을 열고 가까이 가려는데 갑자기 그 사람이 그 자리에 쓰러졌습니다'
[검 사] '기절 했나요?'
[웨이터] '의식을 잃은 건 아니었죠. 뭐라고 몇마디 했어요'
[검 사] '뭐라고 말입니까?'
[웨이터] '(기억을 더듬는 듯) 나는 매일같이 조금씩 죽어가고 있다. 누군가 매일같이 조금씩 죽이고 있다'
[검 사] '누가 말입니까?'
[웨이터] '그뿐이었습니다. 제가 물하고 약을 가지고 다시 와보니 그사람 어느새 가버렸더군요'
[장] <제9장>
증인석의 여자.
[검 사] '피고인을 잘 아시나요?'
[여 자] '그럼요 아다마다요, 평판이 열마나 훌륭한 여자라구요, 오죽잘나 빠졌으면 제 남편을 잡아 먹었겠어요. 안 그래요?'
[검 사] '그건 무슨 의밉니까?'
[여 자] '저 여잔 살인자가 아닌가요?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재판을 열었나요?'
[페이지] 007
[검 사] '증인이 그렇게 믿는데는 그럴만한 이유라도 있나요?'
[여 자] '그거야 뻔하지 않아요? 안그래요?'
[검 사] '어째서죠?'
[여 자] '지난 봄에 33번지에 불이 난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 그 남자가 타 죽을 뻔 했어요'
[검 사] '김주현이가 말입니까?'
[여 자] '네 모두들 불이났다고 세간살이를 옮긴다 불을 끈다 난린데 그 사람만은 방안에서 꼼짝도 안했어요'
[검 사] '불이 난걸 몰랐나요?'
[여 자] '모를리가 있겠어요? 안 그래요'
[검 사] '그럼 알고도 밖으로 뛰쳐 나오지 않았단 말입니까?'
[여 자] '불이 난걸 알았다면 지가 무슨 향우장사라고 버티고 있었 겠어요. 자고 있었답니다'
[검 사] '불이 났는데도 말입니까?'
[변호사] '재판장 이의있습니다'
[판 사] '각하 합니다. 계속하시오'
[검 사] '증인은 그 화재가 김주현이의 죽음하고 어떤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 자] '그런건 저여자한테 직접 물어보세오. 저도 양심이 있으면 무슨 말이구 할 말이 있죠.
안 그래요?'
비웃듯 연심을 본다
[검 사] '(연심에게) 불이 난 그 날 밤에 피고인은 어디 있었나?'
[연 심] '내방에유'
[검 사] '뭘하고 있었나'
[연 심] '뭘하긴 뭘해유 자고 있었지 잠결에 들으니까, 밖에서 불이야 그랬어유'
[검 사] '그래서 어떻했나'
[연 심] '불이 났으니까 밖으로 뛰어 나왔지유'
[검 사] '남편은 내버려 두고 말이지?'
[연 심] '밖에 나와 보니까 큰 불이 아니었어요'
[검 사] '큰 불이 아니라 남편을 안깨웠단 말인가?'
[연 심] '네?'
[검 사] '남편이 위험하다는 생각은 안했나?'
[연 심] '설마하니 사람이 불에 타 죽것시유 불이 난다고 해도 깰 사람도 아니구유, 그 사람은 한 번 잠이 들면 시체에유'
[검 사] '불이 꺼진 다음 어떻했나'
[연 심] '어떡하긴유, 지 방에 들어가서 잤지유'
[검 사] '그냥 잤단 말인가'
[연 심] '그냥 잤지 그럼 어떡해유'
[검 사] '남편은 아침까지 불이 난 걸 몰랐단 말이지?'
[연 심] '예, 아침에 밥상을 들고 들어갔더니 그사람이 자고 있어유 그래서 밥 먹으라고 깨웠지유'
[장] < 제10장 >
밥상. 쪼그리고 앉은 주현.
[연 심] '왜 안 먹어'
[주 현] '배가 고파야 먹지'
[연 심] '누군 배가 고파서 먹나 안 먹으면 죽으니까 먹지'
[주 현] '안 먹는다고 죽으면 얼마나 좋아'
[연 심] '에게게. 안 처먹으면 죽지 왜 안죽어. 그렇게 허기가 져서 자니까 불이나두 모르지'
[주 현] '불이나?'
[연 심] '그럼 그것도 모르고 잤나?'
[주 현] '언제 불이 났지'
[연 심] '어저깨 밤에 그 난리를 피웠는데도 잠만 잤는가'
[주 현] '난 몰랐어. 불이 난 걸 알었으면 눈을 떴을 텐데'
[연 심] '그래두 꼴에 죽기는 싫은가?'
[주 현] '죽기 싫어서가 아니구'
[연 심] '그럼'
[주 현] '불구경 하려구. 세상에 재밌는게 불구경이라던데'
[연 심] '구경만 하겠다 그거여?'
[주 현] '구경만 했지 그럼 뭘해'
[연 심] '그러다 타 죽으면 어떡하구'
[주 현] '그럼 당신이 나 타죽는거 구경하면 되지'
[연 심] '시상에 구경거리가 없어서 그걸 구경하고 자빠졌겠어'
[주 현] '나 죽는건 끔찍한가'
[연 심] '끔찍하지 끔찍 안 한가? 말조심 혀, 가만 듣구 있자니 미친 소리만 지껄이고 있네'
[주 현] '연심아, 온천장에서 나 피 토할때 왜 가만 내버려 두지 않았니'
[연 심] '억울하냐, 살려놔서'
[주 현] '억울하지'
[연 심] '사는게 억울 혀'
[주 현] '억울하지 그럼'
[연 심] '그럼 맘대로 해. 죽을려면 죽고'
[주 현] '그럼 네가 불 지른게 아냐'
[연 심] '뭐여'
[주 현] '난 네가 불 지른줄 알었는데'
[연 심] '지랄'
[페이지] 008
[주 현] '그래서 자는척 했지'
[연 심] '그럼 그때 깨어 있었나'
[주 현] '깨 있었지'
[연 심] '그런데 왜 자는척 했어?'
[주 현] '네가 지른 불인줄 알었다고 안해'
[연 심] '내가 미쳤다고 불을 지르냐. 너 같은 화상 죽이려고 잡혀 갈 짓까지 해?'
[주 현] '내가 또 오해했군. 난 연심이 네가 불을 질렀다고 믿었지. 그래서 이불 속에서 꼼작도 안했던 거야. 연심이가 불을 질렀구나'
[연 심] '아닌게 아니라, 불을 지르고 싶은 생각도 간절했구먼'
[주 현] '그랬어? 정말 그런 생각을 하긴 했구나'
[연 심] '이놈의 방구석 말여, 곰팡내가 나서 구역질이 나 몽땅 태워 버렸으면 좋겠구만'
[주 현] '그럼 오늘 밤에 또 질러보지. 오늘 밤엔 그럼 눈 안뜨고 잠만 잘테니까, 연심아,
그래라, 불 질러라. 눈 안뜨고 꼬옥 잠들게 불 을 질러, 타버리게 활활타버리게, 불질러. 연심아 응 부탁할게 연심아 불 불 불!'
[장] < 제11장 >
법정.
[변호사] '화재가 처음 발생한 곳은 어딥니까?'
[여 자] '그건'
[변호사] '답변해 주시오'
[여 자] '저희집 부엌에서요. 허지만---'
[변호사] '허지만 증인의 실수로 인해서 일어난 화재가 아니란 말씀이시죠?'
[여 자] '나혼자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네요. 동네사람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예요'
[변호사] '증인의 실수였다고는 생각지 않습니까?'
[여 자] '아네요. 그럴리가'
[변호사] '허지만 증인의 실수였을 가능성도 있겠죠. 그래요?'
[여 자] '(신경질 적으로) 저여자가 틀림없어요. 저여자가 남편을 죽이려고 약을 먹였다는 소문이 온 동네 파다 했었어요'
[변호사] '그럼 범인은 소문이군요'
[여 자] '네?'
[변호사] '불을 지른 것도 약을 먹인것도 그 소문이란 말입니다!'
[검 사] '이게 뭔지 알겠오?'
[연 심] '(힐끗보고) 약병이구만요'
[검 사] '무슨 약병입니까?'
[연 심] '아달린 약병이구만요'
[검 사] '아달린이 무슨 약인지 피고인은 알고있나?'
[연 심] '예, 알어요. 허지만 그건---'
[검 사] '무슨 약이지?'
[연 심] '저---'
[검 사] '대답해봐, 감기약인가?'
[연 심] '아네유'
[검 사] '그럼?'
[연 심] '수면제예요'
[검 사] '이 약은 누가 사용했나?'
[연 심] '예?'
[검 사] '피고인 인가?'
[연 심] '네'
[검 사] '왜?'
[연 심] '잠이 안오니까 그렇지유, 그런건 뭣하러 자꾸 물어유, 기분나쁘게'
[검 사] '피고인만이 사용했단 말이지?'
[연 심] '네, 허긴---'
[연 심] '그사람 가끔 먹었어요'
[검 사] '피고인이 이 약을 줬나?'
[연 심] '예'
[검 사] '김주현이두 이 약이 수면젠줄 알고 있었단 말이지?'
[연 심] '먹으면 잠이 오는데 몰랐겄어유'
[검 사] '잠자라고 이 약을 줬단 말이지?'
[연 심] '그렇다니까유'
[검 사] '또 다른 목적이 있었던 건 아니구?'
[연 심] '아네유'
[검 사] '그런데 왜 이 약을 주면서 아스피린이라고 속였지?'
[연 심] '그런적 없어유'
[검 사] '그럼 수면제라고 알려줬나?'
[연 심] '아무말 안했어유'
[검 사] '왜?'
[연 심] '수면젠 줄 알면 잠이 안오니까유'
[검 사] '한번에 몇알씩 줬나?'
[연 심] '기억이 없어유'
[검 사] '한알? 두알? 아니면'
[변호사] '재판장. 검사는 지금 피고인을 유도심문 하고 있습니다'
[페이지] 009
[검 사] '재판장, 피고인은 감기에 걸린 김주현에게 아달린을 아스피린이라고 속이고 매일같이
복용케 했습니다. 그래서 김주현이는 스물 네시간을 최면상태에 있었읍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는 자명합니다.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김주현이의 존재가 피고인 에겐 더 없이 귀찮은 존재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죠'
[연 심] '돈 때문이 아녜요'
[검 사] '그럼 사랑때문이란 말인가?'
[연 심] '예?'
[검 사] '사랑 때문에 김주현이를 살해하려고 했는가 말야'
(연심을 노려 보는 검사)
(변호사 약병을 연심에게 보여준다. 연심 고개 젓는다. 변호가 병에서 하얀 정제 서너알을 꺼내
손바닥에 얹어 보여주며)
[변호사] '무슨 약이죠'
[연 심] '모르겠어유'
[변호사] '잘 보십시오'
[연 심] '(무심히 보다가) 아달린 이구만유'
(변호사 다른 병에서 하얀 정제를 꺼내 손바닥에 얹고 보여주며)
[변호사] '이건 무슨 약이죠?'
[연 심] '(보더니) 아스피린인가 보구만유'
(변호사 판사석에 두손에 든 정제를 각각 따로 놓으며)
[변호사] '재판장 재판장께서는 그 두개의 정제를 육안으로 구별할 수 있는가 보아 주십시오'
[판 사] '무슨 말입니까?'
[변호사] '한쪽은 아스피린 이고 다른 한쪽은 아달린입니다'
[검 사] '(일어나며) 그것이 본 사건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변호사] '김주현이가 감기에 걸렸을 때 피고인이 준 약은 아달린인지도 모릅니다. 허지만 아스피린 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연 심] '아네유'
[변호사] '---'
[연 심] '수면제를 줬어유, 감기약이 아네유'
[변호사] '(딱하다는 듯 쳐다 보다가) 왜 아달린을 줬습니까? 정말 남편을 살해 할 계획이었습니까?'
[연 심] '아녜유'
[변호사] '그럼?'
[연 심] '그 사람이 불쌍해서유, 잠들면 괴로움도 다 잊어 버리거든유'
[변호사] '무엇 때문에 괴로워 했죠?'
[연 심] '그사람은 사는 게 무섭다구 늘 입버릇 처럼 중얼 댔어유. 잠을 깨는게 무섭대유, 해를
보는 게 무섭대유 내일이 온다는 게 무섭대유. 사람두 무섭구 집두 무섭구 하늘두 무섭구 모두모두 무섭대유. 모두--- 모두---'
[장] <제12장>
주현, 연심의 화장대 앞에서 화장을 하고 있다. 연심의 치마를 두르고 머리엔 수건을 쓰고 광인처럼 미소하고 있다. 반사경을 꺼내든다. 객석 쪽으로 눈부신 햇빛을 반사해서 보낸다
[장] <제13장>
법정. 증인석의 형사.
[검 사] '증인은 어째서 김주현이가 타살당했다고 생각했나요?'
[형 사] '비명소릴 들었기 때문이죠'
[검 사] '비명소리라뇨'
[형 사] '김주현이가 미스꼬시 옥상에서 추락하면서 내지른 비명소리 말입니다'
[검 사] '증인은 현장을 목격했습니까?'
[형 사] '네, 마침 서에서 나와 점심을 하러 가던 길이었습니다 때마침 그 사건이 벌어졌죠'
[검 사] '실족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까?'
[형 사] '그럴 수도 있습니다'
[검 사] '그런데 왜 타살이라는 심증을 굳혔습니까?'
[형 사] '그건 제 육감입니다'
[검 사]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오'
[형 사] '자살하는 사람은 비명을 지르지 않습니다. 물론 지르는 경우도 있겠죠. 허나 대부분은 침묵합니다. 더욱이 김주현이의 비명소리는 특이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활동사진에서 보듯이 아- 하고 길게 내지르는 소리가 아니라 뭔가 말하는듯한-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어떤 의사 표시가 들어있는 그런 비명소리였다는 점입니다. 하여간 난 그 비명소릴 듣는 순간에 누언가 처절한 호소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미안합니다. 제 느낌이 너무 예술적인가요?'
[검 사] '감사합니다'
변호사가 뭔가 생각하며 증인석의 형사를 보다가,
[페이지] 010
[변호사] '그때가 몇시경 이었습니까?'
[형 사] '오정 싸이렌이 박 울고난 직후였습니다'
[변호사] '거리가 혼잡했겠군요'
[형 사] '그랬겠죠'
[변호사] '증인은 그때 무슨 생각을 하면서 걷고 있었습니까?'
[형 사] '글쎄요'
[변호사] '시장했습니까?'
[형 사] '무슨 말씀이신지요?'
[변호사] '배가 고팠냐고 물었습니다'
[형 사] '(어이 없다는 듯 픽 웃으며 조롱조로) 그걸 어떻게 아셨죠? 하하'
[변호사] '제 육감입니다'
굳어지는 형사. 검사 벌떡 일어나며
[검 사] '재판장 이건 증인에 대한 모욕입니다'
[판 사] '인정합니다'
[변호사] '이상입니다'
[검 사] '증인이 그 사실을 피고인에게 알려 줬지요?'
[형 사] '예 그렇습니다'
[검 사] '그때 피고인의 태도는 어땠습니까?'
[형 사] '침착했습니다'
[검 사] '남편이 죽었다는 연락을 받고도 말입니까?'
[형 사] '저도 처음엔 무슨 소린지 잘 못들어서 "뭐라구요? 하고 물었죠. 그랬더니 문을 다시 열고 확실친 않습니다만 이랬던 것 같습니다. "새도 아닌게 날긴 어떻게 나느냐 육갑이다"
그리고는 문을 다시 꽝 닫더군요'
[검 사] '그리곤 다시 내다 보니도 않더란 말이죠'
[형 사] '네 그랬습니다'
[검 사] '시체실에서 피고인이 정신착란 증세를 보였다는데?'
[형 사] '그렇습니다'
[검 사] '설명해 주시오'
[형 사] '제가 피고인에게 시체를 덮은 보를 확인하라고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피고인은 시체를 보지도 안고 눈을 감아버렸습니다. 그리곤 무작정 끄덕이면서---'
[장] <제14장>
관위에 놓인 주현의-손. 그속에 연심이가 뛰어들며 울부짖는다.
[연 심] '병신 죽긴 왜 죽어, 지가 뭔데 제 멋대로 죽는 거여. (갑자기주현의 상체를 어루 만지며) 어디 보자, 네 날개 좀 보자, 부러 졌는가, 어떡하다 새도 아닌 것이 날긴 날았는가.'
(미친듯이 주현의 상체에 손을 넣는다)
[형 사] '왜 이래 미쳤어 이봐'
형사가 연심을 시체에서 떼어 낸다. 연심 와락 주현의 시체에 다시 달려 들며
[연 심] '내가 죽였다구유. 내가 난다 난다 날 업신보듯 하두 노랠 불러대서 내가 쥑였다구유. 지까짓게 날긴 어떻게 날어. 지가 날면 내가 먼저 날았지 (깔깔 거리며 웃는다) 훠이, 훠이 날아봐, 하늘 높이 날아봐, 새면 새처럼 날아보란 말여, ---'
시체를 얼싸안고 웃음인지 울음인지-.
[형 사] '무슨 짓이야, 일어나, 일어나라구'
형사가 연심을 시체에서 떼어내 끌고 나간다. 그 바람에 시체가 뒹군다.
[연 심] '(끌려 가며) 저 인간이 이년 가슴에 못을 쳤어. 살아서 못 치구 죽어서 못 치구 인간두 아녀, 새두 아니구 인간두 아니구. 저건 헛깨비여, 헛깨비여'
[장] < 제15장 >
법정. 풀없이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는 연심.
[검 사] '(연심에게) 미스꼬시 옥상엔 김주현이와 함께 간 적이 있었다는데'
[연 심] '예'
[검 사] '언제지?'
[연 심] '바로--- 그 날에유'
[검 사] '김주현이가 옥상에서 추락한 바로 그날 말인가?'
[연 심] '예'
[검 사] '바로 그 순간에도 말인가?'
연심 고개를 돌아 검사를 바라 본다.
[검 사] '대답헤봐. 같이 있었나?'
[연 심] '네'
야릇한 미소가 마치 백치같은-
[장] < 제16장 >
한 낮. 미스꼬시 백화점 옥상. 연심과 주현이 난간에 나란히 서 있다. 거리의 소음이 아득히 들려온다.
[페이지] 011
[연 심] '어때유 기분이?'
[주 현] '좋군'
[연 심] '숨을 크게 한번 숴봐유, 이렇게'
따라하는 주현. 그리곤 두 사람 마주 보고 웃는다.
[연 심] '사람은 건강이 제일에유, 몸이 병들면 마음두 병든 대유'
주현 연심을 물끄러미 바라 보더니
[주 현] '여보'
[연 심] '왜유?'
[주 현] '설마 당신이---'
하더니 고개를 젖고 만다.
[연 심] '무슨 말에유?'
[주 현] '아냐, 아무것두'
[연 심] '싱겁긴, 말을 해 봐유, 무슨 말인가'
[주 현] '우리 부분 절룸발이야, 나도 너도. 허지만 난 당신이 좋아. 지금 이대로의 당신이
(중얼대듯) 사실은 사실대로 오해는 오해대로 그저 끝없이 발을 절뚝 거리면서 세상을 걸어가면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은가?'
허공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주현. 햇빛에 눈이 부신가 보다.
[연 심] '여보'
[주 현] '응?'
[연 심] '날 한번 안아봐유'
주현 연심을 본다. 웃어 보이는 연심. 주현 연심을 가만히 안아본다.
[연 심] '나는요 당신을 잘 모르겠어요 아마 당신하곤 백년을 같이 살아두 당신이 게으름뱅이구
잠꾸러기라는 것 밖에 모를거에유 그래두 되지유?'
주현 갑자기 연심을 와락 포옹한다. 억세게 포옹한다. 그의 생전 처음으로- 그때 싸이렌이 길게
울기 시작한다.
[주 현] '아-'
주현 갑자기 연심을 밀치고 귀를 막는다.
[연 심] '여보. 왜 그래요. 또'
[주 현] '아 저놈의 소리'
주현 옥상 난간 위로 올라간다.
[연 심] '위험해요, 떨어져유, 떨어지면 죽어유'
[주 현] '사람들은 모두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득거린다.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는다. 현란하다. 눈부신 햇빛. 어지럽다. 어지러워, 어지러워, 머리속에선 희망과 야심이 말소된 페이지가 사전 넘어가듯 번뜩인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자꾸나. 한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주현, 두손을 나래처럼 편다. 연심이 비명치며 달려온다. 순간 싸이렌이 뚝 멎고 뛰어 내리는 주현. 그 현란한 비상의 판토마임.
[장] < 제17장 >
법정.
[검 사] '김주현이가 제발로 뛰어 내렸단 말인가'
[연 심] '잡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검 사] '거짓말, 피고인이 김주현이를 밀었지? 옥상 아래로 말야 계획적으로 김주현이를 미쓰꼬시 옥상으로 유인해서 떼밀어 죽인거야 안 그런가?'
[연 심] '아네유, 그런게 아네유, 검사님은 몰라유, 그 사람이 왜 죽었는지 나두 모르는 걸유, 삼년을 같이 살았어두 나두 모르는 걸유. (사이) 그래요 내가 쥑였어유, 새두 아닌게 난다기에 어디 나나보자 밀었어유 네 내가 쥑였어유'
[검 사] '재판장 이상입니다'
[변호사] '피고인에게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남편을 사랑했습니까?'
[연 심] '아니유'
[변호사] '그럼?'
[연 심] '그 사람은 나없으면 하루도 못사는 사람에유 처음 만날때부터 그랬어유. 피를 토하고 까무러 쳤다가 깨어나면 날겠다고 두손을 퍼득이고--- ( 사이) 그래유, 그 사람은 모를 사람에유 정말 모르것어유, 전 정말 그 사람을 이해할 수가 없었어유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고 헤메다니다가 그렇게 죽었는지 말에유. 그런데,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플까유 예? 대답 좀 해주세유. 왜 이년의 가슴이 이렇게 찢어질듯 아플까요 누가 대답 좀 해주세유 예?'
[페이지] 012
[장] < 제18장 >
한 줄기 햇빛이 방 바닥에 비추인다. 그 햇빛에 화장대 위의 유리병들이 반짝인다. 거기에 물체인양 흐느적 거리는 남자의 손.
[주 현] '(소리)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굿바이--- 그대는 이따금 그대가 제일 싫어하는 음식을 탐식하는 아이러니를 실천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소. 위트와 파라독스와--- 테잎이 끊어지면 피가 나오. 상채기도 머지않아 완치될줄 믿소. 굿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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