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설명
서울 근교에 자리잡고 있는 김근욱씨의 별장 거실. 서양풍. 바닥에는 진한 자주색 양탄자 를 깔았다. 완만한 타원형의 벽은 얼핏 보아 현대식으로 장식되어 있으나 품위는 별로 없는 편이다. 우측에 현관으로 통하는 문이 있고 중앙 후면에 정원으로 통하는 문이 있는데 그것은 간소하게 테라스의 형태로 만들어져 있으며 유리문을 달았다 떼었다 하게 되어 있다. 테라스에는 대나무로 만든 등의자가 두 개 마주 보게 놓여 있다. 테라스를 통하여 정원의 일부와 다른 별장들이 보인다. 현관문과 테라스 사이의 공간에는 간이식 술상이 있는데 거기 있는 술병들은 모두 비어 있다. 그 위 벽에는 정물화가 한폭 걸려 있다. 테라스 좌측으로 책장이 있는데 고서와 신간서적들이 무질서하게 배열되어 있다. 그 앞에 흔들의자가 한 개 있고, 이층 침실로 올라가는 계단은 한 번 꼬부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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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 객석에서 볼 수 있는 부분은 계단 중간 정면 벽에 걸려 있는 여인의 나체를 그린 추상화 비슷한 그림뿐이다. 좌측 끝에 식당으로 통하는 문이 있고 책상 옆에 전화. 후면 무대보다 한 단 낮은 무대 전면에 작은 탁자가 한 개 놓여 있고 그 주위에 긴 소파 한 개와 안락의자가 두 개가 싸고 있다. 탁자 위에는 동양식 꽃병이 있고 칸나 한 묶음이 꽃혀 있다. 거실은 손질이 잘 되어 있는 편이지만 어딘가 무성의하고 조심해 보면 먼지가 쌓여 있는 부분도 있다. 벽면은 최근에 색칠을 새로 해서 깨끗하나 색갈을 잘 못 선택해 더욱 어색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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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1장
초 여름의 화사한 햇살이 거실 가득히 넘친다. 정원에 피어 있는 꽃들이 싱싱한 향기를 내 뿜고, 매미 울음소리가 한창이다. 식당에서 웃음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동휘와 동석이 얘기를 주고 받으며 거실로 들어온다. 동휘는 서른 한 살 정도, 건장한 체격을 하고 있지만 어딘가 병색이 짙다. 특히 혈색이 노동자처럼 거무틱틱해 보인다. 아무렇게나 걸친 밤색 샤스가 퍽 어울리고 젊은 시절에는 한껏 멋을 부렸었을 것같이 어단가 세련된 구석이 내 비친다. 동석은 스물 넷. 형에 비해 마른 몸집이나 혈색이 좋고 눈은 총기에 차 있다. 그의 옷차림은 얼핏 보면 깔끔한 은행원을 연상시키나 허술한 구석이 있어 몸에 잘 붙질 않는다. 동석은 한참 얘기에 열중한다. 동휘는 중앙 소파에 앉아 신문을 읽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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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석] 강아지가 제 꼬리를 물려고 돌아가는 꼴이라니! 정말 굉장 했었다우. 아버진 글쎄 시치미를 뚝 떼시고, 아, 웃지도 않으시드라니까, 강아지 꼬리에 빨간 리본을 달아 매시다니, 아버지두 참. 그통에 죽어난 건 뷰티뿐이지, 고 새침둥이 아가씨가.
[동휘] (시큰둥하게) 아버진 늘 그리셨어.
[동석] (여전히 싱글거리며) 무슨 말유?
[동휘] 아니다. (이죽거리듯) 개를 붙잡고 그 따위 장난이라니.
[동석] 신기하지 않우? 아버지가 얼굴을 피고 웃으시니까 십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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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젊어보이시든데.
[동휘] 뭐가? 꼬리에 빨간 리본을 단 개 말이야?
[동석] 아버지 말유? 아버지가 그런 장난을 다 치시다니 요 몇해 동안 아버진 의기쇄침 하셨잖우?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칠 팔년 동안이나 한 번두 웃으신 적이 없거든.
[동휘] 네가 뭘 안다구?
[동석] (상관하지 않고) 요즘 아버지 기분이 퍽 좋아지셨어. 역시 이리로 오길 잘했지.
[동휘] 난 반대다.
[동석] (악의 없이 놀리듯) 허지만 결국 형두 오고야 말지 않았우?
[동휘] 아버지가 강제로 끌고 오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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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석] 안 가면 내 쫓아 버린다구 위협하셨지.
[동휘] (자존심이 상해서) 너나 내나 마찬가지지. 제기랄! 서른이 넘도록 아버지에게 얹혀 살다니!
[동석] (대수롭잖게) 그래두 형은 나은 편야. 나야 말로.
[동휘] 비꼬지 말아. 내가 이렇게 무능해진 건 내 탓만은 아니다.
[동석] (애정에 차서) 여기서 몇 달만 지내면 형 건강도 나 질거야.
[동휘] (담배를 피워 물며) 난 글렀어.
[동석] (걱정스럽게) 의사 선생님이 담밸 삼가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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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휘] 괜찮다. 하루에 서너 가치쯤. 의사두 그러드라.
[동석] (머뭇거리며) 형은 몸 조심 좀 해야겠어. 의사 선생님 말씀이 지금은 대수롭지 않지만 조심하지 않으면 정말 나뻐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동휘] (생각에 잠겨) 술 때문에 영 몸을 망쳐 버렸어. 그 놈의 술이라니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건든.
[동석] (기분을 돌리기 위해 우스개 소리로) 어제 밤 내 방에서 듣자니 아랫층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던데.
[동휘] (진심으로 듣고) 왜 이러니? 아버지가 집 안에 술이란 술은 온통 감춰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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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 너두 알지 않니?
[동석] (싱글거리며) 집히는 구석이 있는가 보지?
[동휘] (당황해서) 어제 저녁엔 잠이 하두 안 와서 여기서 쉬고 있었다. 달빛이 참 좋드라.
(동석이 실글거리자 화가 나서) 너까지 날 의심하는구나?
[동석] (불쌍한 느낌이 들어) 그런 소릴. 형 건강 때문에 아버지나 나나 여간 마음이 쓰이는 게 아니거든.
[동휘] (어색하게) 내 걱정은 말아 내 나이 벌써 서른 하나야. 나 되려 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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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이다.
[동석] 건강이 회복돼서 소설두 다시 쓰구하면.
[동휘] 소설 얘긴 꺼내지두 마라. 내가 무슨 작가라구.
[동석] 모르시는 말씀 독자가 많다는 걸 좀 아시지요?
[동휘] 허긴 다시 써 보고 싶은 맘이 없는 것도 아니다마는--- (식당에 김근욱씨와 경애의 웃음 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맥빠진 듯한 억지로 지어 내는 미소같이 어색하게 들린다. 동휘는 얼굴을 찌프리며 식당쪽을 노려보다가 의자에 등을 푹 기대고 눈을 감는다. 동석은 갑자기 초조해진다. 애써 감정을 감추며 어슬렁거린다. 등의자에 가 앉는다. 식당쪽에서 이번에는 녹 슨 쇠에서 나는 듯한 거친 말소리가 들려온다. 이어서 즐거운듯한 경애의 웃음소리. 잠시 침묵이 흐르고)
[동휘] (기분이 몹씨 상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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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소리라니 마치 양철 조박을 긁어대는 소리 같지 않느냐 말야. 그 목소리에 대학 총장이라니. 맙소사!
(동석의 변화를 느끼고) 넌 아버지와 경애씨가 무슨 얘길 저리 야단스럽게 하고 있는지 아니?
[동석] (어깨를 추키며) 결혼 얘기겠지.
[동휘] 식은 언제 올리지? 참.
[동석] 경애넨 올 가을쯤.
[동휘] 잘 됐구나. 대 재벌의 따님과 대학 총장이 되실 번한 분의.
[동석] 비꼬지 말아요.
[동휘] 비꼬긴 진담이다.
[동석]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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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휘] 왜? 경애가 마음에 안 차니?
[동석] (잠깐 생각하다 내 던지듯) 너무 완전하거든.
[동휘] 응?
[동석] 빈틈이 없다니까.
[동휘] 무슨 소린지--- ?
[동석] 부족한 게 한 가지도 없다 어딘가 이상하지 않우?
[동휘] 이상하다니? 뭐가?
[동석] 완전하기 때문에 속고 있다는 느낌같은 것. 뭔가 중요한 뭉청이가 어떤 착오 때문에. 툭. (손으로 떨어져 나가는 흉내를 내는데)
[동휘] (손을 내 저으며) 그만 뒤라. 난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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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석] 알겠우? 뭔지.
[동휘] 넌 지금 행복한 거야. 누구나 마찬가지지. 막상 행복이 손아귀에 쥐어져 있을 땐 멍청히 바라보고만 있다간 하늘로 훨훨 날라가 버린 뒤에야 후회하거든. 네 형이 좋은 본보기지. 바로 내가 말이다. 내가 왜 그따위 철없는 짓을 했었는지 후회가 된다.
[동석]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냐.
[동휘] (자신 있게) 그저 눈 딱 감고 잡아버리는 거야. 물론 한 두어번 제스처를 써 보는 것도 나쁘진 않다만 그것도 절제가 필요해.
[동석] (긴장하며) 아냐. 아냐.
[동휘]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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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석] 제스처가 아냐. (미안해 하며) 난 형하곤 좀 달러. (멋적게 웃고) 형은 세상은 단순하게만 보지만.
[동휘] (이죽거리듯) 내가 단순해?
[동석] 나쁜 뜻으로 한 말은 아니고, 아버지하고의 관계만 해도 그렇지. 형은 무조건 아버지를 나쁘게만 말하지만 아버지의 진심은 잘 모르고 있거든. (동휘가 긴장하자 미안해서) 아무튼 형은 나보다 나이를 더 먹었으니까, 응. 사물을 현실적으로 폭착할 수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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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휘] (도피하듯 가볍게) 계속해.
[동석] 난 가끔 쓸 데 없는 질문을 생각해내. 넌 정말 경애를 사랑하니? 하고.
[동휘]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니? 그럼.
[동석] 언젠가 같은 대답 뿐야. 돈, 미래, 예쁜 아내, 사회적 지위. 이런 것들은 경애와 결혼하면 얻을 수 있어. 허지만 (다음 말을 주저하다, 나직이) 허지만 경애가 아닌 다른 여자라도 마찬가지지. 그런 행복이라면 어디든 있거든. 여기 저기 말야.
[동휘] (안심하고) 자식, 네 어렸을 때가 생각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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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석] ?
[동휘] 아버진 널 무척 귀여워 해 주셨지. 허지만 엄만 달랐다. 널 낳은 걸 무척 후회하셨다. 그런데도 넌 아버지가 사다주신 장난감보다 엄마 뒤만 졸졸 따라다녔지. 엄마가 돌아가시자 넌 또 곧 새로운 일에 열중했어. 너만큼 집념이 강한 놈두 단념이 빠른 놈두 첨 봤다. 난 네가 부럽다. 너처럼 맘에 드는 것은 무엇이고 자기 것을 만들 수만 있다면야.
[동석] (형을 유심히 바라보며) 그게 나쁘우?
[동휘] 아니, 그런 말은 아니다. 욕심이 없는 사람은 위선자거나 죽은 사람이겠지.
[동석] (테라스로 가며) 난 지금도 이해할 수가 없어. 엄마가 날 미워한 이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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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휘] (당황해서) 그건, 저.
[동석] (갑자기 환희에 차서) 아, 저것.
[동휘] 뭐야?
[동석] 꽃, 저 여름 꽃들 좀 봐. 장미, 히비스카스, 과꽃, 칸나, 수레바퀴꽃, 안개꽃--- 꽃마다 사연이 있지. 난 다 알고 있어. 그 중엔 굉장히 슬픈 놈두 있단 말야.
[동휘] 저런.
[동석] (동휘를 끌며) 정원에 나가요, 응
[동휘] 난 햇볕이 싫다. 여기서 쉬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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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석] 여기 있단 아버지 잔소리나 들을 걸.
[동휘] 아버지 잔소리야. 귀를 막고 있으면 되지만 정원에서 눈을 감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지.
[동석] (테라스로 다시 가며) 꽃이 싫다니, 어떻게 된 거야 형은?
[동휘] 그런데 경애 말이다.
[동석] (관심이 없어져서) 그만, 그만요. (자기 도취에 빠져들며) 꽃 속에 ?혀 있으면 눈물이 핑하거든. 웬진 절 모르지만 내가 살아 있다니, 하고 생각되면 정말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하고 누군가 붙잡고 울어버릴 것만 같단 말야 아무튼 산다는 건 즐거운 일이잖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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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 흉내를 내서) 아, 나는 삼 초에 한 번 숨 쉬고, 내 심장은 삼초에 네 번씩 고동 치네.
[동휘] (웃으며) 넌 시인이 될 걸 잘못했다. 그 꼴에 경제학이라니, 참.
[동석] (동휘의 흉내를 내서) 이 술 한 잔 들고, 꽁드레, 저술 한 잔 들고 망드레.
[동휘] (싫지 않아서) 네가 이렇게 그걸 다 기억하고 있지?
[동석] 형은 그때가 좋았서. 술이 취하면 늘 이 시를 읊었지. 난 형의그런 데까당한 모습이 웬지 좋았거든.
[동휘] (생각에 잠기며) 그래, 허지만 진절머리가 난다. 그때부터 난 아버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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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에서부터 근욱의 말소리가 가까와진다. 동휘, 말을 중단한다)
[동석] (선수를 처서) 이크! 아버지 오시네. 미안해요, 형. (동석 정원으로 퇴장. 동휘는 잠깐 망서리다 이미 너무 늦은 걸 알고 테라스 등의자에 가 앉는다. 근욱과 경애 등장. 근욱은 육십 삼세. 백발이 희끗거리나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인다. 작은 귀에 땅딸한 몸집. 학자라기보다는 사업가형이다. 입이 야비한 느낌을 주나 그의 사회적 지위가 감싸고 있어 교묘하게 감추어져 있다. 전체적으로 봐서 그의 외양은 당당하고 품위가 있어 보인다. 경애는 스물 둘. 특징 없는 둥그스럼한 얼굴. 키는 중키다. 조금 살찐 가난하다면 볼 품이 없을 여자. 엷은 핑크 색의 요란한 무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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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힌 투피스를 입고 있다. 그들은 얘기에 열중해서 동휘를 눈치채지 못한다.)
[근욱] 하루가 멀다 하고 편지가 오 갔지. 내가 학업을 마치구 동경에서 귀국하기까지 삼백 통이 훨씬 넘었으니까.
[경애] 어머!
[근욱] 한 번은 그 사람이 예고도 없이 동경으로 날 찾아오지 않았겠니? 비는 주룩주룩 내리고 웬지 심란해서 학교도 안 나가구 하숙방에 딩굴고 있는데 누가 날 찾아 왔다는 거야. 경성서. 그래 나가보니 그애 애미드라.
[경애] 로맨틱하네요.
[근욱] 처갓 집에서 우리 사이를 반대했다. 그 해 딴 남자와 강제로 정혼을 시키려 들기에 무턱대고 나만 믿고 집을 나왔다는 거야,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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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 그래서요.
[근욱] 근데 내가 뭐랬는지 아니? 대뜸 한다는 소리가 큰일입니다. 아시다시피 전 무일푼입니다 야. (그들 웃는다) 나두 참 바보였어. 그리곤 그 사람보구 잠간만 기다려 주세요. 하고는 방에 들어가서 있는 돈 몽땅 털어서 그 길로 곧장 현해탄을 건넜어.
[경애] 어쩌자구요?
[근욱] (회상하듯이) 비를 맞고 서 있던 그 사람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잊을 수가 없다. 그 눈매하며--- , 그애 애미도 참 대단했어.
[경애]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근욱]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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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리고) 한 바탕 소란을 피우고, 머리를 싸 매고 돌격 끝에 합업을 마친 후에라는 단서를 달고 겨우 승락을 얻었지. (유쾌해져서) 지금은 그렇지도 않지만 그때만 해도 연애결혼은 엄두도 못 내던 때였으니까 나도 보통은 넘었지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아무튼 빈 손으로 출발했으니까.
[경애] 퍽 낭만적이군요.
[근욱] 지나가고 보니 그렇지. 그 당시는 골치 깨나 썩혔지.
[경애] 저, 예쁘셨나요?
[근욱] 누가?
[경애] 동석씨--- 어머니요?
[근욱] (과장해서 웃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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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예뻤어, 허지만 뭐 제 눈에 안경이라고 나야 물론 그렇게 생각했을 거구. 모르긴 해도 장안에선 미인으로 소문이 자자했지.
[동휘] (비꼬듯) 그리고 부자였죠.
[근욱] (비로서 발견하고, 당황해서) 어, 너로구나.
[동휘] 아버지야 언제나 변함없으시지요.
[근욱] (정색을 하고) 근데 너 방금 전에 뭐라고 했지?
[동휘] 변함 없으시다구요.
[근욱] (화를 내며) 아니, 그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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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휘] (능청 떨며) 네! 어머닌 미인이시구.
[근욱] 그리구?
[동휘] 부자이셨다구요.
[근욱] 건 무슨 뜻이지?
[동휘] (신경질을 내며) 꼬치꼬치 캐지 마세요. 아버지도 다 아시면서.
[근욱] 내가 뭘 안단 말이냐?
[동휘] 제가 틀린 말을 했나요? 거짓말을 했어요?
[근욱] (기가 막혀) 저 말버릇 좀 보게.
[경애] (둘 사이를 막으며) 그만들 두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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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욱] 다 죽어가는 녀석을 자식이라고 살려 놓았드니 그래.
[경애] 아버님이 참으세요. (근욱을 의자에 앉힌다.)
[근욱] 네 놈은 맘보가 글러?었어. 베베 꼬여 가지고 남의 험담이나 하구.
[동휘] (무시하고 경애에게) 아버지와 무슨 얘길 했어요?
[경애] (즐거워서) 지금 들으셨잖아요? 젊어서 연애하시든 얘기 퍽 낭만적이시었나봐요.
[근욱] (기분이 나빠서) 그 녀석한테 맘 쓸 것 없다.
[경애] (계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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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를 가진 연인들. 얼마나 멋있어요. 아마 저래두---
[동휘] (비양치 듯) 우리 아버지같은 남자와 결혼했을 거란 말이지요?
[경애] (그렇다는 듯) 네에.
[근욱] 또 무슨 험담이 하구 싶어서?
[동휘] (경애에게) 내가 여자래두 아마 그랬을 거야.
[근욱] 저런!
[경애] (재미 있다는 듯) 왜요?
[동휘] 아버진 미남이구 재주꾼이시겨든.
(근욱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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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진 원숭이 띠시든가요?
[근욱] (놀리는 줄 모르고) 글쎄
[동휘] (생각에 잠기며) 내가 어렸을 적엔 아버지가 무척 좋았어. 지금도 그렇지만 (나직이) 정말 아버진 좋은 분이셨어.
[근욱] 물론 그랬겠지. 네가 술을 마시기 전까지는.
[동휘] 그래요.
[근욱] 막 소주를 사발로 마셨댔지. 돈이야 충분히 줬지. 그 돈을 다 어디다 쓰고, 흥. 싸구려 막소주라니.
[동휘] (나직이) 제가 쓰진 않았어요. 아버지가 의당 쓰셔야 할 곳에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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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제가 썼을 뿐이지요.
[근욱] (의혹에 차서) 뭐라구?
[동휘] (잊으려는 듯) 아녜요. 아녜요. (잠시 숨막힐 듯한 침묵이 흐른다. 동휘는 외면하고 근욱은 의혹에 차저 아들을 노려본다. 경애는 이 어색한 분위기에서 도망치고 싶어한다.)
[경애] (동휘에게) 저, 동석씬 어디 계세요?
[동휘] (천천히) 정원에 있어요. 시인이 되구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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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 시인요?
[동휘] (힘없이) 녜, 시인요. 가 보세요.
[경애] 그럼. (근욱과 동휘의 눈치를 보며 정원으로 나간다. 경애가 퇴장한 후 에도 침묵은 계속된다. 이윽고 근욱이 증오에 차서 아들을 노려보며 입을 연다.)
[근욱] (나직이) 다시 한 번 말해 봐라. 다시 돈이 어떻게 됐다구?
[동휘] (아버지를 노려 보다가 힘없이) 사실은 아침에 전화가 왔었어요.
[근욱] 전화라니?
[동휘] 말하지 않을 작정이었지만, 어차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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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욱] 무슨 소리냐?
[동휘] 사실은
[근욱] (노여워서) 무슨 전화가 왔는데 무엇 때문에 네가.
[동휘] (아버지를 한참 보다가) 허--- 정민씨 한테서
[근욱] (경악에 차서) 뭐! 허. 정. 민. 바로 그 사람이?
[동휘] 지금 쯤 이리로 오고 있을 거에요.
[근욱] 그 사람이 무엇 때문에 여길 온단 말이냐? (다급하게) 내가 이 별장에 있는 걸 어떻게 알았지?
[동휘] (불상해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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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시겠어요?
[근욱] (고집부리며) 뭘? 뭘 어떻게 한단 말이야? (다시 침묵이 흐른다. 차츰 그들은 제각금의 체념에 빠진다. 근욱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떠 오르고 과거의 한 지점을 더듬기 시작한다. 일종의 비웃음이 그를 괴롭힌다. 동휘는 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그를 괴롭힌다 그것은 부친에 대한 미움이 클수록 비례해서 커진다. 근욱은 갑자기 피곤해진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쓸어질 것 같다.)
[근욱] (힘 없이) 난 이층으로 올라가서 좀 쉬어야 겠다. (근욱은 천천히 쓰러지지 않으려고 애쓰며 걷는다. 마치 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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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조작되는 인형같이 부자연스럽다. 이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동휘] (중얼거리듯) 전 역으로 가겠어요. 기차를 타고 오겠지요? (갑자기) 그애도 올거에요!
(이미 근욱은 사라지고 없다. 천천히 웃기 시작한다. 조용히 현관으로 나가는 문을 열고 퇴장한다. 한참 동안 거의 지루할 정도로 무대는 비어 있다. 고조하는 매미 울음 소리. 이윽고 테라스 쪽에서 경애가 뛰어 들어와 숨을 곳을 찾는 듯 주위를 두리번 거린다. 동석이 경애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얼른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 숨는다. 동석이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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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온다. 잠시 경애를 찾어 두리번 거린다. 테라스 등의자에 앉는다. 경애, 인기척이 없어 살며시 방안을 기웃한다. 동석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다.
[경애] (나오며) 찾지 않아요?
[동석] (조용히) 거기 있군.
[경애] (토라져서) 찾지 않느냐 구 했어요?
[동석] (맞은 편 의자를 가리키며 여기 와 앉어.
[경애] 싫어요.
[동석] (다시 눈을 감아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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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 (할 수 없이 가서) 요즘은 생각만 하시는 군요. (모르겠다는 듯) 도대체 무슨 생각들이지요?
[동석] 이것 저젓, 잡념들.
[경애] 생각하지 않고는 살 수 없나요?
[동석] (잠시 경애를 바라보다가) 생각이야 누구나 하게 마련 아냐.
[경애] 첨엔 제 생각을 하시는 줄 알았어요, 근데.
[동석] 근데?
[경애] (토라져서) 제 생각은 아니잖어요.
[동석] 여러 가지 생각이라니까 물론 경애 생각도 하구.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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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 (고심스럽게) 제 생각만 해 줘요. 전, 그런 걸요. 전 그래요, 당신 생각만 하고 있어요.
[동석] (맥 없이) 무슨 생각들?
[경애] 집이며 가구며 많잖아요? 당신이 앉아서 책을 읽으실 의자며 커튼이며 그 밖에도 얼마든지 있어요. 그것들을 생각하고 있으면 행복해져요.
[동석] 그건 여자가 해야 하는 일 아냐?
[경애] 그렇지요.
[동석] (싱겁게) 그러믄 난 무슨 생각을 하지?
[경애] 그걸 저에게 물으시면 어떻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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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석] 그렇게 법석을 떨게 뭐 있어?
[경애] 법석이라니요?
[동석] (일어나며) 우리 약혼한 사이가 아냐?
[경애] (의혹에 차서) 녜?
[동석] 그러니까 결혼할 거구, 또.
[경애] (항의하 듯) 그게 불만이신가요? (화가 나서) 알겠어요, 제가 싫어지셨군요.
[동석] (간단하게)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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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 속이지 마세요.
[동석] (물끄러미 정애를 보다가 외면하며) 저것 봐, 정원의 꽃들.
[경애] 녜?
[동석] 저 눈부신 햇볕, 새들, 그 속에선 누구나 사랑할 수 있지. 이 세상에서 생명을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난 사랑해.
[경애] (신경질적으로) 무슨 뜻에요?
[동석] (진심으로) 당신에게도 꿈이 있어?
[경애] (도전하 듯) 있어요, 바로 당신이에요.
[동석] (나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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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당신을 사랑해. 믿어 줘. 허지만 더 맑고 신선한 것이 우리에겐 없어. 그건 당신 책임이 아냐. 누구의 책임도 아냐.
[경애] (힘 없이) 알 수가 없군요. 당신은 꼭 무언가 홀린 사람 같애요. 당신이 생각에 젖어 있으면 마치 백지처럼 창백해져서 무서운 생각이 들군 해요. 그럴 때의 당신은 내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에 있는 느낌예요. (애원하듯) 난 당신을 잃어버릴 것만 같애서 두려워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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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석] (가볍게 포옹하며) 그렇지 않어.
[경애] 제 곁에 있어 줘요. (두 사람은 잠깐 동안 포옹한 채로 서 있다. 이 때, 부자 소리가 길게 두 번 연거퍼 울린다.
[동휘] (밖에서 소리만) 아버지, 아버지 허선생님 보세요. (현관 문이 열리며 동휘가 한 손에 가방을 들고 방안으로 들어선다.
[동휘] (밖에다 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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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 오세요. (동휘가 문 밖을 향해 들어 오라는 손짓을 하는데 천천히 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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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2장
일장에서 십분쯤 경과. 근욱과 허정민이 중앙 의자에 앉아 얘기하고 있다. 인혜는 테라스에서 관객에게 등을 돌린채 정원을 보고 있다. 동석은 책장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서 인혜를 훔쳐보고 있다. 허정민은 근욱과 비슷한 나이지만 훨씬 늙어보인다. 후리후리한 키에 마른 몸집이다. 고생때문에 머리는 반백이다. 아직 관객이 얼굴을 볼수 없는 인혜는 숱이 많은 검은 색의 긴 머리카락을 가졌다. 스물 하나 정도 선이 뚜렷한 얼굴. 피부는 희다 못해 창백하다. 얼핏 보면 백치같은 눈을 가졌다. (근욱은 초조의 빛을 감추기 위해 담배를 피워 문다. 뒤늦게 정민에게도 권하나 정민은 사양한다. 침묵이 무겁게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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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혜가 몸을 돌린다. 동석의 시선을 의식하고 그를 본다. 동석은 황급히 인혜의 눈길을 피한다.)
[정민] (가라앉은 목소리로) 집찾기에 애먹을 번 했네. 별장이래서 자네집만 생각했드니 엇비슷한게 오목조목 여간 많아야지. 동휘를 만났길래 다행이지 날 샐 번 했네! 그려.
[근욱] (애써 밝게) 응, 작년부터 집들이 들어서기 시작했지. 전엔 이집 한 채만이 오뚝했지.
(주저하다가) 그래! 요즘은 어찌 지내나?
[정민] (여전히 흥미 없는 목소리로) 나야 뭐 늘 그렇지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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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혜를 가르치며) 그저 저애 시집이나 보내면 한시름 놓겠네만은--- (근욱, 인혜를 본다. 인혜 백치같은 눈빛으로 근욱을 바라본다. 일견, 무심한 눈길이다. 근욱 금시 시선을 피한다.)
[근욱] (머뭇거리며) 이름이---
[정민] (인혜를 가리키며) 저애 말인가?
[근욱] 응.
[인혜] (나직이) 허인혜예요.
[근욱] (되 씹 듯) 허, 인, 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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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듬히 인혜를 보며) 몇 살이지?
[정민] 스물 하날쎄.
[근욱]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중얼거리듯) 스물 하나라 이십 일년이 지났단 말이지, 그럼.
[정민] 뭐라구?
[근욱] (황급히) 아, 아닐세. 아냐.
[정민] (빙긋 웃으며) 내가 갑자기 자넬 찾아와서 놀랬겠네.
[근욱] (얼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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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아닐세 아냐. (아무래도 동석이 맘에 걸려서 동석에게) 얘. (동석은 테라스 의자에 앉아 주먹으로 턱을 괴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인혜에게 정신을 잃고 있다.)
[근욱] 얘, 동석아!
[동석] (아버지를 보지 않고) 녜?
[근욱] 너 말이다.
[동석] (이윽고 아버지를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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녜.
[근욱] (좋은 생각이 나서) 그래, 허선생님 따님 모시고 집안 구경이나 시켜 드리렴.
[동석] (좋아서) 녜. (인혜에게) 그러시겠어요?
[인혜] (가만히 동석을 쳐다보기만 하다)
[동석] (어색해서) 별로 볼 것은 없지만
[정민] (인혜에게) 그렇게 하려므나.
[인혜] (아무 말 없이 일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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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석] (신이 나서 앞장 서 정원으로 나가며) 이 정원은 제가 직접 가꿨어요. 웬만한 꽃 종류는 대개 있는 편이지요. 이리 오세요. (동석과 인혜가 퇴장하다. 근욱은 갑자기 초조해진다. 그는 테라스 쪽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는 정민을 불안에 차서 응시한다. 정민이 다시 얼굴을 돌려 근욱을 보자 근욱은 고개를 떨군다.)
[정민] 저얘가 둘짼가?
[근욱] 응.
[정민] 건강해 뵈는군.
[근욱] (호소하 듯) 자. 이젠 말해보게.
[정민] 뭘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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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욱] 왜 이러나, 자네가 날 만나러 왔을 때야?
[정민] 넘겨집지 말게.
[근욱] 날 놀릴 셈인가?
[정민] (잠시 사이를 두고) 사실은 (어색하게 웃고) 내가 이런 말 한다고 내가 무슨 자네에게 떼를 쓰러왔다거나 위협한다고는 생각지 말아 주게.
[근욱] 말 해 보게.
[정민] 사실은 인혜 에미가--- 지난 월요일 밤에 죽었네.
[근욱] (놀래며) 죽어? (다구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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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했단 말인가?
[정민] (고개를 젓고) 병사야. 반년이 넘도록 누워 있었지. 의사 말이 신장염 이라고 하데.
[근욱] 그랬어!
[정민] 그사람 고생 수태 했네.
[근욱] 몰랐군. (희미하게) 신장염이라고 했나?
[정민] 손도 변변히 못 써 봤네. 그 병은 돈 떨어지면 죽는 병이라드군.
[근욱] (힘 없이) 미안하네. 돕지 못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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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자조하 듯) 지금 와서 무슨 다 쓸 데 없는 소리지.
[근욱] (불안하게) 지금도, 지금도 자네 날 원망하나?
[정민] (체념하 듯) 내게 남은건 이제 아무 것도 없네. 원망하고 말 것도 없네.
[근욱] (죄책감에 사로 잡혀) 나만 아니였던들 자네가 지금처럼 불행해지진 않았을 걸세.
[정민] 그만 두세. (조용히) 우린 늙었어. 남은 여생 조용히 지내다 죽으면 그 것으로 족하네. 과거는 다시 되풀이 될 수도 없고, 또 다시 재현 되어서도 안되네. 과거속에 묻어버리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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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욱] 허지만
[정민] 자, 그만.
[근욱] 여보게 정민이, 진심일세. 내게 속죄할 기회를 주게.
[정민] 속죄? (미소하며) 속죄하니? 어떻게, 어떻게 하겠단 말인가? 염불이래도 외고 단식이라도 하겠단 말인가?
[근욱] 비웃지 말게. (진심으로) 남은 건 회한 뿐일세. (발작적으로) 난 학교에서도 밀려났네. 총장이 돼 보겠다던 내 꿈은 깨져 버렸어. 그 꿈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고 다 해온 날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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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웃게 맘껏.
[정민] (싸늘하게) 과장하지 말게. 자넨 성공한 측이 아닌가?
[근욱] (험악해져서) 왜 진심을 말 못하나? 자네가 여기 온 건 사실은, 사실은 내 이 꼬락서니가 보고싶어서라고 말야. 응?
[정민] (설득하듯) 난 자넬 힐책할 생각도 용서할 말도 없네. 그건 내가 할 일이 못 되네. 자넨 내가 자네 때문에 불행해졌다고 하네만 설령 그렇다고 하드래도 누구때문에 불행해질만큼 못나빠진 놈이라면 불행해져도 당연하지 않겠나. 내 생각은 그렇다네. 결국 자신을 책임질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네.
[근욱] (한숨 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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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할 수가 없어 자넬---
[정민] (쓸쓸히 웃으며) 마찬가질세. 나두 내 자신을 모르겠어. 가끔 마치 독사처럼 미움이 머리를 치키지. 나는 참을 수가 없어져서 소리래두 꽥 질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진단 말일세. 그러면 어디선가 마음 한 구석에서 숨 죽은 소리로-그래선 안 돼- 하고 나를 힐책하거든 결국 난 맥 빠져서 아무것도 못하게 된단 말일세. 그저 정신 없이 용서니 뭐니 떠들어 대고 그도 지치면 술이나 마시구 싶어지구. (침묵이 흐른다. 그들은 차츰 상호 협조하기 시작한다. 마지막 서로의 자존심을 상하지 않도록 서로 도움으로써 겨우 그들의 자세를 유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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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욱] (조금 여유가 생겨서) 혹 내게 부탁할 일이래도 있나?
[정민] 저.
[근욱] 돕겠네.
[정민] 이건.
[근욱] 돕겠다니까.
[정민] 이건 내가 결정한 건 아니네.
[근욱] 뭔가?
[정민] 인혜. 그애를--- 맡아줄 수 있겠나?
[근욱] (아연해져서) 인혜를---
[정민] 그애도 여기라면 있겠데구. 또 나로선 그애를 더 이상
[근욱] (의혹에 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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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애도 모든 걸 알고 있군?
[정민] 아냐. (하다가 근욱의 눈치를 살피며) 허긴 그앤 자넬 원망하네만 건 자네가 날 모하마해서 내가 학교에서 쫓겨났다고 알고 있기 때문이네 단지 그 뿐이야.
[근욱] (다짐하듯) 정말 그것 뿐인가?
[정민] (확실하게) 그 이상은 정말 모르네.
[근욱] 근데 무엇때문에 내가 그앨.
[정민] (괴로워 하며) 더 이상은 묻지 말게. 나도 그애 속은 잘 모르니까. 여태까지 그앤 나한테 자기 일을 한 마디도 상의해온 적이 없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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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까.
[근욱] 설마, 그애가.
[정민] (근욱의 손을 잡고) 내가 부탁하네 마지막이자 처음이야. 만일 자네가 나에게 빚진 것이 있다는 생각이면 내 부탁을 들어주게. 제발.
[근욱] (체념하듯) 좋아, 그애가 정말 그 정도밖에 모른다면.
[정민] (진심으로) 고맙네. 고마워 이젠 한시름 놓았네.
[근욱] (정민이 걱정이 돼서) 근데 자넨 어쩔 생각인가?
[정민] 나? (쓸쓸히 웃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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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야 뭐 어떻나. 그애를 자네가 맡아준다면 실없는 소리지만 그앤 날 미워하는 모양야. 그애한텐 아무 상관 없을 걸세.
[근욱] (기분을 돌리려고) 하여간 며칠 여기서 웃으면서 차근히 처리하도록 하세.
[정민] 아냐. 그럴 수 없네.
[근욱] 왜?
[정민] 난 곧 떠나야겠네.
[근욱] 떠나다니? 어디로?
[정민] 마지막으로 산소에나 가 볼 생각일세.
[근욱] 산소라니? 그럼.
[정민] 살았을 제 못한 말. 지금에야 뭐 가릴게 있겠나. 속 시원히 흉금을 털어놔 버리면 오죽 시원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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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욱] 무슨 말인가? 자네 혹시?
[정민] (웃으며) 자살이라도 할 것 같은가? (자조하며) 나같은 놈은 죽지도 못해. 이십년을 흐지부지 살아왔는데 새삼스레 무슨 사치겠나, 자살도 내겐 과분하단 말일세. (일어서며) 그럼.
[근욱] 아니, 지금 당장 기겠단 말인가?
[정민] 아무래도 떠날 것.
[근욱] 허지 만 (하다가 말릴수 없음을 알고) 정 지금 가야겠다면 말리지 않겠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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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스로 가며) 애들을 부르지.
[정민] (황급히 앉으며) 그만두게, 그만. (근욱멈춰선다) 그애에게 미리 말했네. 알고 있을 거야. (근욱 제자리로 다시 온다.) 잘 있게. (하며 천천히 현관 문으로 걸어간다) (이때 정원에서 인혜의 웃음소리 들려온다)
[동석] (밖에서 소리만) 그렇지만 난 실망하진 않았어요. 다시 한번 되풀이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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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석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인혜는 더욱 웃어댄다. 그것은 웃음소리라기보다 마치 비명처럼 변해간다. 정민 맥없이 정원쪽을 보고 있는데 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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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3장
2장에서 일주일이 지난 주말. 오후 세 시 경. 햇빛이 화사하고 매미 울음소리가 더욱 요란스럽다. 지금 막 서울에서 내려온 듯한 옷 차림의 경애가 한 손에 양산을 든 채 초조하게 테라스를 서성거린다. 얼굴을 찌프린다. 전화벨이 울린다. 경애는 기다렸다는 듯 뛰어가 수화기를 든다.
[경애] (조급하게) 여보세요, 네, 그렇습니다. 장거리 부탁했었는데요. 녜! 얼른 대 주세요.
(사이) 여보세요, 아, 여보세요. (잘 들리지가 않아서 큰 소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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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효자동이지요? 저 경앤데요, 누구세요. (기뻐서) 아, 엄마유? 나에요, 경애. (사이)
응, 응, 잘 있어요. 근데, 엄마. (울듯이) 일이 생겼어요. 괜히 왔어요. 아무래도 정말 파혼이래도 해야겠어요. (사이, 짜증이 나서) 아니래두요, 제가 뭐 어린애인가요. (사이 시무룩하게) 동석씬 지금 없어요. 없다니까요. 서울 올라간 게 아니구요. 어떤 여자하구요, 같이 나섰대요. 산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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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질이 나서) 산보요, 산보 (사이) 그렇다니까요. 저 지금 당장 서울로 올라가겠어요. 참을 수가 없는 걸요. (사이 화가 나서) 이젠 엄마까지 그러우, 몰라요. 제가 결정하겠어요.
(수화기를 급히 내려 놓는다. 수화기에 손을 얹은 채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는다.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어진다. 현관 문으로 황급히 간다. 동휘가 이층에서 내려오다 경애를 발견하고)
[동휘] 아--- 니 언제 오셨습니까?
[경애] (휙 돌아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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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못 올 데를 왔나요?
[동휘] (어이가 없어) 무슨 (중앙 의자에 앉으며)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어디, 가시려구요?
[경애] 녜?
[동휘] 어디.
[경애] 동석씨 찾으러요.
[동휘] 그애 집 안에 없습니까?
[경애] 산보 나갔다나요, 그 여자 하고요. 식모 애가 그러든데요.
[동휘] (가볍게) 그래요? 그럼 곧 오겠죠, 뭐. 좀 전에 점심들을 들었으니까, 소화제 대신 산보도 좋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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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를 가르키며) 앉으세요.
[경애] (침착하게) 저 제가 묻는 말에 대답해 주시겠어요? 꼭요.
[동휘] (빙긋 웃고)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래도 할까요? 말씀해 보세요.
[경애] (벌컥 화를 내며) 도대체 그 여잔 뭐예요?
[동휘] 누구.
[경애] 지난 일요일 풍뎅이처럼 날아 든 그 천치같은 여자 말예요.
[동휘] (빙긋 웃으며) 아, 인혜 말이군요. (간단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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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여자, 여자 말입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경애] 같은 여자끼린데 어떻게 신경이 안 쓰여요?
[동휘] 설마 벌써부터 사랑싸움은 아니시겠지요?
[경애] 저 농담할 기분 아녜요. (중앙소파에 털석 앉으며) 뭔가 동석씬 변해가고 있어요.
[동휘] 변하다니요? 뭐가요?
[경애] 저 아닌 다른 사람들과는 웃고 떠들다가도 저하고 단 둘이만 있게 되면 갑자기 생각해져요. 그땐 정말 미워요. 참을 수가 없어요.
[동휘] 그건, 저--- .
[경애] 전 알아요.
[동휘] 사실은 완전하기 때문에 늘 착오인 경우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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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 여자들의 직감은 정확해요. 적어도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자길 사랑하는 사람에 관해서는요.
[동휘] (잠간 생각하고) 그애가 요즘 뭔가 연화를 격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허지만 그애를 믿어 주십시요. 제가 걔를 두든해 주고 싶어서 이런 말씀 드리는 건 아닙니다.
[경애] 그이를 탓하는 게 아녜요. (안타까와서) 전, 다만 그이가---
[동휘] 알고 있습니다. 그리구 그애도 알 거예요.
[경애] (머리를 가만히 흔든다)
[동휘] 믿어 주십시요. 이럴 때일수록 신뢰가 필요합니다. 자기의 사랑을 믿는 사람은 남의 사랑도 믿게 마련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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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 (조용히) 아무튼 그이한테 한번 따져봐야 겠어요. (이 때 현관문이 열리며 동석이 들어온다. 기분이 좋아 보인다. 그 뒤에 인혜가 따라 들어온다. 경애, 동석을 노려본다. 동석 굳어진다. 인혜, 경애를 무시하고 이층으로 간다.)
[경애] (인혜에게) 잠깐! (인혜가 못 들은 척 그냥 계단을 올라가자, 화가 나서) 당신에게 말했어요!
[인혜] (돌아보며, 간단히) 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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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 그래요!
[인혜] 왜 그러시죠?
[경애] 할 얘기가 있어요.
[인혜] (계단을 내려와서) 무슨 얘기지요?
[경애] 당신이 뭐에요? 무엇 때문에 훼방을 놓아요?
[동석] 경애!
[인혜] (천천히) 제가요? 훼방을 놓아요? 무엇 때문에?
[경애] 누굴 놀리는 거에요!
[인혜] 무슨 말씀이신지.
[경애] 당신이 동석씨의 뭐지요.
[동석] (두 사람 새에 끼어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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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 무슨 짓야!
[경애] (화를 참으며) 비키세요. 저리 비키세요!
[동석] (인혜에게) 자! 이층으로 올라 가세요. 사과는 나중에 드리지요.
[인혜] 괜찮아요. 괜찮아요 여기 있겠어요.
[경애] 잘 생각했어요. 언제고 할 얘기 서로 속시원하게 털어 놓는 것이 좋잖아요?
[인혜] (경애에게) 얘기, 해 보세요.
[경애] 당신이 누구며 어째서 이집에서 살아야만 하는지 그런 건 묻지 않겠어요. 다만, 이것만은 분명히 말 해 두고 싶어요. (자신을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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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동석씨의 약혼자예요.
[인혜] (미소하며) 알고 있어요.
[경애] 제가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동석] 손님한테 실례가 지나치군, 그래.
[경애] 대답해 보세요.
[인혜] (냉정하게) 사랑은 믿음예요. 믿음이 없으면 거짓이지요.
[경애] 뭐라구요?
[인혜] 내가 당신이라면 이런 바보같은 짓은 하지 않겠어요.
[경애] (부끄럼을 느끼나 격렬하게) 그럼 당신은 어때요? 자기의 사랑을 믿나요? 아니 도대체 누군가 사랑한 사람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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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혜] 그건 무슨 뜻이지요?
[경애] 당신은 거만하고 잘난체 하거든요, 당신을 첨 보고 알았어요. 당신이 어떤 여자라는 걸.
[인혜] 당신 말이 맞아요. 난 여지껏 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어요. 허지만 왜 그랬는진.
(빙긋 웃고) 당신 같은 여잔 모를 거예요.
[경애] 그래요! 난 몰라요. 허지만 당신같은 여잔 모를 거야. 연인들이 얼마나 불안한지, 사랑이 클 수록 자신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가를 알게 되요. (이층으로 간다. 동석이 따라 오자 보지도 않고) 저 혼자 있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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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 퇴장)
[동석] (어색하게 웃으며) 어쩝니까? 이 경우 약한 건 역시 남자 쪽이거든. (하며 이층으로 퇴장) (인혜 잠간동안 생각에 잠긴다. 갑작이 빙긋 웃는다. 동휘가 힐끔 그녀를 본다. 인혜 다시 정색을 하고 동휘에게로 온다)
[동휘] (좀 당황해서) 앉으세요. (인혜가 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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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낼만 합니까? 촌 구석이라 되서 답답하시지요.
[인혜] 아니요, 좋아요. (망서리다) 매달 돈을 보내주셔서 고마웠어요. 허지만,
[동휘] (모르겠다는 듯) 돈이라니요? 무슨,
[인혜] (침착하게) 허지만 저나 엄마는 그 돈, 쓰지 않었어요. 아버지가 쓰셨지요. 그래서 전 아버지가 미웠어요. 그 돈으로 술이나 마시고, 영 재기를 단념하셨어요.
[동휘] (할 수 없이) 아, 그 돈 말씀이시군요, 난 또.
[인혜] 남의 동정은 받구 싶지 않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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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살아가겠어요, 무슨 일이 있어요.
[동휘] (말을 막으며) 제가 보낸 그 돈 얘긴데요. 오해하진 마십시요. 전 다만 허선생님이 학교를 그만 두신 내막을 좀 알고 있었고 그것이 제 아버님의 잘못이었다는걸 알고 있었죠. 그뿐입니다. 아버지도 내내 그 일을 후회하셨으니까요. 그래서,
[인혜] 도의적 책임을 느끼셨다는 말씀인가요?
[동휘] 꼭 그렇진 않습니다마는, (어깨를 으쓱하고) 제 아버님도 알고 계셨으니까요.
[인혜] 묵인하셨다는 말씀이군요.
[동휘] 결국 찬성하신 셈이 되겠지요.
[인혜] 어찌 됐든 좋아요, 전 다만 고맙다는 말만은 꼭 해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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싶었어요. (낮은 소리로 웃고) 아버진 그 돈으로 맘 놓고 타락하셨대요. 남자들은 괴로우면 술을 마시지요. 비겁해요. 술이라니. (나직이) 결국 아버진 미워할 능력도 잃구 말았어요. 미움도 애정도 없는 사람, 죽은 사람이지요. (잠시 침묵이 흐른다.)
[동휘] (미안해 하며) 인혜씨 어머닌 끝 까지 제 아버님을 미워하셨나요?
[인혜] (아무렇지도 않게) 제가 알고 있는 어머닌 미워할 줄 밖에 모르는 분이었어요. 그것만이 제게 물려준 유산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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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휘] (한숨 짓고, 밑도 끝도 없이) 그래요?
[인혜] (갑자기 공포에 질리며) 우린 돈이 필요했어요. 돈만이 어머니를 살려낼 수 있었어요. 이십 년 동안이나 우린 가난했고 그 이상 가난해 질 수도 없게 되자 어머닌 돌아가셨어요. 그나마 어머니를 살려온 건 증오였지요. (히스테?하게 웃으며) 모르겠어요. 증오 때문에 살아오신 어머니가 그 미움에 쪼들려 돌아가시다니. (동휘는 가만히 듣고만 있다. 인혜는 점점 난폭해진다.) 때에 겉은 더러운 씨트가 깔린 빈민용 차선병원에서, 어머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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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소호흡기를 입에 물고 한 팔뚝에 피주사를 꽃고 다른 팔뚝엔 다른 주사를, (겁에 질리며)
아, 잊을 수가 없어요. 어머니의 입 가장이에 말라붙은 검은 핏덩이. 허공을 향해서 부르뜨신 쾡한 두 눈. 종내 지워 버릴 수 없으셨던 미움과 당신의 생명의 마지막 순간에 감지하신 회한과 절망! 전 알고 있었어요. 무엇이든지 알 것만 같앴어요. 전 그 순간 죽음의 냄샐 맡었으니까요. (애써 진정하며) 어머니의 말라 비트러진 두 손이 제 손을 꼭 부여 잡았어요. 그리곤 그리곤 말씀하셨어요! (말을 중단한다 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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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휘] (불안해서) 무슨 말을,
[인혜] (고개를 천천히 흔들고) 말할 수 없어요.
[동휘] (참을 수가 없어서) 당신은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오.
[인혜] (비웃으며) 한 대학교수가 공금을 유용한 혐의로 재단이사회에서 해임이 결의 되었어요. 이십년이 넘은 얘기지요. 이건 신문에도 났었던 사건이에요.
[동휘] (침착해지려고 애쓰며) 그래서요?
[인혜] 재단이사회가 있기 전날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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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교수는 공금관리의 책임을 맡고 있던 교수를 찾아갔었어요. 두 사람은 전부터 막연한 사이였으니까요. 그러나 그 친군 냉담 했어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동휘의 대답을 기다린다.)
[동휘] 음.
[인혜] 헌데 기막힌 사실은, 공금을 빌려준 사람도 고발한 사람도 다름아닌 바로 그 친구였다는 거예요.
[동휘] (힘 없이) 그만
[인혜] 한 가지만 더요. (익숙하게) 그 교수의 친구는 그 교수가 급하게 돈이 필요한 걸 알고 또 빌려준 돈을 짧은 시일 내엔 갚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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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요, 그래서 (동휘를 비웃듯 보며) 돈을 빌려줬어요.
[동휘] (벌떡 일어서며) 어쩔 셈요, 당신은?
[인혜] 전 아무 일도 안 해요. 이렇게 가만히 있겠어요.
[동휘] (신음하 듯) 무서운 여자군 <화가 나서> 당신을 내 쫓아 버리겠어. 견딜 수가 없어.
(동휘 증오에 차서 인혜를 노려 본다. 인혜 피하지 않는다. 동휘는 더 이상 견디지 못 하고 이층으로 도망치듯이 올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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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이 얼어서. 근데 갑자기 하늘이 온통 붉게 타 오르드니,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맥혀서.
(웃으며)
[인혜] 깨보니 꿈이었군요.
[동석] 녜, 재미 없지요?
[인혜] 아름다운 얘긴데요. (일어난다.)
[동석] 왜! 일어나세요.
[인혜] 그만 쉬겠어요.
[동석] 아까 일 때문에 그러세요.
[인혜] 혹. (동석을 정면으로 보며) 제가 무섭지 않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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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석] 무섭긴요, 좋아요.
[인혜] 좋다구요?
[동석] 녜.
[인혜] 어떤--- ?
[동석] 당신은 남자들이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여자처럼 보여요. 허지만 당신과 같이 있으면 뭔가 제가 어려서부터 막연히 그려오던 꿈 같은 것, 잘 모르겠지만, 신선하고, 맑은것, 마치 생명이 구체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면, 아마 당신일 거라는---
[인혜] 제가요? 틀리신 생각에요. 평범한 여잔걸요.
[동석] 아니오. 당신을 달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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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혜] (동석의 시선을 피하며) 그 여자에게 가 보세요. 혼자 있고 싶다는 뜻 아세요?
[동석] 누구나 혼자 있구 싶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인혜] 여자가 생각을 시작하면 애정도 식어요.
[동석] 왜요?
[인혜] 여자가 혼자 있으면 아주 볼품이 없거든요. 가 보세요.
[동석] (마지 못해서 가며) 그럼.
[인혜] 저, (동석이 돌아보자, 외면하고, 중얼거리듯) 저 마음이 변할지도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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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석] 어떻게--- 말입니까? (인혜, 동석을 뚫어지게 노려본다. 슬픔이 서서히 끓어오른다. 그녀는 외로워진다. 모든 것을 말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고개를 흔든다. 동석이 한 발 앞으로 나선다. 인혜, 동석을 막 듯이 손을 내전다.)
[인혜] (괴로워서) 아, 무서워요. 무서워서 아무 것도 ,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동석] 왜 그러세요? (인혜를 잡으려 한다.)
[인혜] (피하며) 당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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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인가 이으려 하나 잘 되지 않는다. 고개를 다시 한번 서서히 흔들고, 갑작이 발작 하듯 나지막하게 웃기 시작한다. 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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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4장
3장과 같은 날 밤. 9시 경. 비가 내리고 있다. 지붕을 두둘기는 요란한빗소리. 이층에서 경애가 치고있는 피아노 소리가 빠른듯 느리게 음산하게 들릴지경이다. 근욱은 서양식 잠옷을 걸치고 중앙소파에 앉아 안경을 끼고 책을 읽고 있다. 여유를 보이려고 애쓰나 불안하다. 동석은 문을 닫은 테라스 창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다. 그는 기가 줄어 있다. 근옥은 책에서 눈을 떼어 동식을 한 번 보고, 다시 이층 쪽으로 시선을 준다. 다시 책을 읽으려다 덮는다. 안경을 벗고 기지개를 킨다.
[근욱] (동석에게) 비가 내려선지 웬지 심란해지는 구나. 이리와 앉거라. 얘기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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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석] (움직이지 않고) 녜.
[근욱] 이리 오라니까.
[동석] 녜. (근욱에게로 온다.)
[근욱] 엄청하게 널 생각하고 있었다? 무슨생각이라도 있는냐?
[동석] 아니요.
[근욱] 그럼?
[동석] 맘 쓰지 마세요.
[근욱] 참, 네 형은 아직 안 들어왔니?
[동석] 네.
[근욱] 병원에서 시간이 이렇게 오래 걸릴니가 없는데.
[동석] 한잔 하는가 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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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욱] 한 잔? (역정을 내며) 또 술을 대기 시작했나? 정신이 없구나. 후회하지, 다 죽게 되서 말야,
[동석] 내버려두세요. 형이 뭐 어린앤가요.
[근욱] 다 큰 녀석이 그 모양이니 걱정이지. (정식을 하고) 근데, 너 경애하고 아까 다퉜니?
[동석] 네, 조금.
[근욱] 왜? 그애가 울고 있든데, 무슨 심한 말을 했길래,
[동석] (피아노 소리가 거슬러서) 저 피아노, 누가 치는 거지요? 듣기 실군요.
[근욱] 경애가 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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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욱] (생각에 잠겨) 그리고 보니 우리 집에서 저 소릴 듣는 것도 꽤 오래 됐구나. 가끔 네 어미가 저 피아노를 치지 않었네, (멋적게 웃으며) 비가 내려서 그런가 보지? 엉뚱하게 죽은 네 어미 생각이 다 나구,
[동석] (이층으로 가며) 가서 말하구 오겠어요.
[근욱] (생각에 잠긴채) 얘! 그만 둬라. 좀 듣잤구나, 그애가 치구싶어 치는건데,
[동석] (단념하고) (잠시 침묵이 흐른다.)
[근욱] 너하고 단 둘이 얘기하기도 오래됐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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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석] 그래요.
[근욱] 경애한테 잘 해 쥐라. 그앤 널 사랑한다. (동석이 무슨 말인가 하려 하자 막으며) 아니, 뭐 그애를 두둔하고 싶어하는 말은 아니다. (곤란해 하다.) 그리고 그애완 가까이 하지 않는게 좋겠다 인혜말이다 무슴 무슨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동석] 모르겠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근욱] (유옥에 차서) 그럼그게 사실이었니?
[동석] (고개를 저으며) 아니오, 아니오. 그렇진 않아요. 사랑이니 뭐니 할 계제가 못 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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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욱] (두려움에 떨며) 만일, 네가--- . (격렬하게) 아니, 절대로, 그런 일은 벌어질수 없다. 내가 그따위 망싱을 다하다니, 나도 이젠 늙었다.
[동석] 이럴땐 정말 술이래두 마시고 싶군요.
[근욱] 술? 정말 마시고 싶으냐?
[동석] 녜, 취하고 싶어요.
[근욱] 자식두! (식당을 가르키며) 식당에 가 봐라. 숨겨 논 술이 있을테니.
[동석] 어디요?
[근욱] 식모한테 물어봐라. 아마 양주 한병은 남아 있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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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석] (가다가) 아버지도 하시겠어요?
[근욱] 아니, 관 둬라. 아니, 네가 마시다 남겨둔 한잔쯤 갖다주렴, 이따가 말야. (동석이 퇴장한다. 근욱은 치상에 잠긴다. 야릇한 미소가 감돈. 그 순간 그는 선량한 한 사람의 순수한 개인으로 돌아간다. 그의 모습에는 점점 꾸밈이 없어진다. 이층에서 인혜가 소리없이 내려 온다. 근욱을 보고 잠간 놀래나 곧 태연해진다. 근욱은 눈을 감고 평온하게 생각에 잠겨 그녀가 온 것을 알지 못한다. 인혜는 그의 등 뒤로 소리없이 다가 간다. 그의 목에다 손가락으로 총을 만들어 가만히 갖다 댄다. 근욱 놀래서 공포에 질려 눈을 뜬다. 인혜, 나직이 팡--- 하고 총소리를 낸다. 근욱 한숨을 쉰다. 인혜 작으마한 쾌감에 몸을 떨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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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 시작한다.)
[근욱] 장난이 심했다. 정말 놀랬다.
[인혜] (근욱 옆에 앉으며) 뭣때문에 놀래세요?
[근욱] (대꾸 않고) 네 아버지 한테선 아무 연락도 없었니?
[인혜] 저보다 더 잘 아시고 계실텐데요.
[근욱] 내가?
[인혜] 녜. (명랑하게) 저하고 아버진 아무도 상관도 없어요. 관심이 있는 사람은 제가 아니라 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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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손가락으로 근욱을 가르킨다.)
[근욱] (태연하게) 내가 뭣 때문에. 그 사람에게 해 줄 것은 다 해 줬다.
[인혜] 돈을 주셨나요? 많이요?
[근욱] (당황해서) 돈이라니? 무슨,
[인혜] 됐어요, 아버진 걱정 없군요.
[근욱] (격해서) 돈 준 일 없다니까!
[인혜] (비꼬며) 그래요! 허지만 잘못하겠어요, 돈을 주셨다면 한결 개운하셨을 것을.
[근욱] (절망에차서) 네가, 뭘--- . 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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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혜] 왜, 절 이집에서 내 쫓지 못 하시지요?
[근욱] 그건 네 아버지의 부탁두 있구.
[인혜] 그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구, 저 이렇게 세사람씩에게나 불행을 안겨준 김근욱교수의 양심의 가책같은 건가요?
[근욱] 무슨 말버릇이냐?
[인혜] 제말 때문에 기분을 상하셨다면 미안합니다. 하지만 기분을 상하신 정도로 어림도 없잖아요?
[근욱] 네가 나를--- 협박하는구나?
[인혜] (어처구니 없다는 듯 웃으며) 적선해 주십사, 하고 비는 줄 아세요? 아녜요, 적선은 제가 베풀어 드리세요. (심문하듯 무대를 왔다 갔다 하면서) 당신에겐 아무일도 않해요. 첨엔 그럴 생각이었지만 여기와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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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이 달라졌어요. 허긴 제가 당신에게서 직접 받은 피핸 없으니까요. 그래서 저두 똑같은 방법으로 그러니까, 당신이 가장 애끼는.
[근욱] (벌떡이러서며) 그럼, 넌. 그애한테 계획적으로
[인혜] 아니요. 계획적이 아니요, 아직 그만큼 타락하진 않았어요.
[근욱] 설마, 네가--- 그런 일을--- ?
[인혜] (초조하며) 왜요? 동석씨와 제가 사랑에라도 빠질까봐서요?
[근욱] 안 될 소리 (자신을 가지러고 애쓰며) 허지만 설사 네가 그럴 생각이 내두 어림 없다. 그앤 네 뜻대로 안될 거다, 그앤 경애와 올가을엔 결혼한다. 무슨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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슨 일이 있어두 꼭 한다. (애원하며) 얘야, 제발 그애만은 건드리지 말아다오. 그래, 그애 쁜이 아니다. 너까지 파멸하구 만다.
[인혜] (괴로워서) 알아요, 저두알아요.
[근욱] 그럼 됐다. 네가 원하는건 뭐든지 다 주마. 내생명이라도 말야. (진심으로 후회가 돼서) 동석이 그앤 아무 것도 모른다. 그애는 우리들의 과거와는 상관이 없다. 제발 끄러드리지 말어요.
[인혜] (참으려 하나 결국 견디지 못하고)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저지르셋이요, 무엇 때문에,
[근욱] 날 그렇게 노려보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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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혜] (차츰 타락해 지며) 당신 같은 사람이 살아 있다니 믿을수가 없군요. (점점 미소까지 띄우며) 곤경에 빠진 친구의 아내를 겁탈하고, 오히려 그 친구를 계획적으로 타락시킨다니, 뭐라고 변명하시겠어요. 그것도 친구의 아내를 죽도록 사랑했었기 때문이라고 하시겠어요? 녜?
[근욱] 하고 말이 내가 어떻게
[인혜] (침착하게) 나쁜건 아버지였어요. 아버진 어머닐 용서하지요 버리지도 않으셨어요. 견딜수 없는 그릇이지요 아마 저래두 미치고 말없을 거예요. 술을마시고 들어와선 부정한 계집이라고 비웃어 대고 어머니가 견디다 못해 집을 뛰쳐나가시면 한사코 따라와서는 불쌍한 계집 이라며 울러대거 든요. 그래서 전인간이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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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아버질 용서하구 인간이기 때문에 미워했어요. 그래서 결국 난 한 비겁자를 생각해 냈어요.
[근욱] 내 말을 믿지 않겠지만 난 그 일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그런데두 끝내 용서를 빌지 못한건 내 헛된 자존심, 사회적 지위와 명예, 그런 자지구레한 것들 때문이었다. 나만한 나이가 되면 인생을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떻게 되겠지, 어떻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되겠지. 미련은 자꾸만 꼬리를 물고.
[인혜]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무었라고 했는지 아세요? 「그사람이 만일 날 찾아 온다면 절대로 날만나게 해서는 안된다.」 어머닌 당신의 늙고 병든 모습을 보시고 싶지 않었던 거예요. 그수 많은 세월 가운데 쌓인 미움속에 한 가닥 애정이 (나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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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전 달라요. 전 내 운명을 원치도 않은 어려운 초롱속에 가두고 매절한 사람을 죽도록 미워해요. 죽도록 근욱은 허탈 상태에 빠진다 (이때 동석이 식당 문을 열고 한손엔 양주병을 들고, 다른 손엔 술잔을 든 채 등장한다. 그는 알맞게 취했다. 걸음걸이가 좀 흐뜨러졌으나 심하진 않다.)
[동석] (근욱에게) 술 드시겠어요?
[근욱] 아니 괜찮다.
[동석] 조금 아깐 나중에 드시겠다고
[근욱] 그래 한 잔 다오.
[동석] (술을 따라주며) 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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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욱 단 숨에 들어키고 잔을도루 준다.) 더 하시겠어요?
[근욱] 아니 됐다.
[동석] (인혜에게) 한잔 하시겠어요?
[인혜] 마실 줄 몰라요.
[동석] 조금만?
[인혜] 사양하겠어요.
[동석] 술 취하기 싫으세요?
[인혜] 네--- 싫어요.
[근욱] (일어나며) 난 좀 쉬겠다. (이층으로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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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네 형이 들어오거든 내 방으로 좀 오라고 해라.
[동석] 그렇지요 뭐. (근욱 이층으로 퇴장)
[동석] (한잔 따라 마시며) 제아버지와 무슨 얘기 하셨어요?
[인혜] 별로.
[동석] 우리 아버질 미워하시지요?
[인혜] 제가 ? 때문에, 신세까지 지면서
[동석] (정색으로) 다 들었어요.
[인혜] (놀라지 않고) 그래요?
[동석] 올랬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그런사람이라니,
[인혜] 취 하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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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석] 아니지요. 취하다니요.
[인혜] (이층으로 가며) 쉬세요.
[동석] 잠간.
[인혜] 녜?
[동석] 저 결심했습니다.
[인혜] 뭘 요?
[동석] 당신과 결혼하겠어요.
[인혜] (웃는다.)
[동석] 웃으시는군요. 제가 아버지 대신 속제라도 하겠다는 줄 아십니까? 아녜요. 절대로 아녜요.
[인혜] 알어요.
[동석] (취기가 돌아서) 알어요.
[인혜] 자, 장난은 그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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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석] (가까이 가며) 놓치지 않겠어요.
[인혜] 왜 이러세요?
[동석] (붙잡으며) 당신은 지금 태연한 척 하지만 속으론 울고 있을거야. 그렇지요?
[인혜] (차겁게) 놓으세요, 이걸
[동석] 아니요 놓지 않겠어요. 내 생명만큼이나 꼭 잡고 왔겠어요. (이때 경애가 이층에서 내려오다 이광경을 본다.)
[동석] 경애에게 말 하겠어요. 당장. 파혼하겠다구,
[경애] (침착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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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어도 되요.
[동석] (놀래서 돌아보며) 당신 (으쓴하며) 다들었군.
[경애] 미안해 할 것 없어요. (현관으로 간다.)
[동석] 어딜 가?
[경애] 어딜 가는냐구 물으셨어요? (평온하게) 집예요. 제갈곳이 거기 말고 또 어디 있겠어요.
[동석] 열시기 넘었어. 막차도 떠났을걸.
[경애] (쓸쓸히) 가지 말이고 하진 않으시는군요. 걱정마세요. 차를 놓치면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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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에 서라도 자지요.
[동석] (마음이 흔들리며) 저, 경애, --- 난--- .
[경애] 더 이상 아무 말도 마세요.
[인혜] (진심으로) 가실필요 없어요. 제가 먼저 나갈테니까요.
[경애] (조용히) 당신은 상관마세요. 제가 동석씨와 헤여진 다음 당신뜻대로, 하세요. 허지만 그전엔 저희들 문제지 당신이 참견할 일이 못되요.
[인혜] (괴로워 하며) 당신들 두사람은--- . 마지나처럼 (외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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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 (동석에게 조용히) 혹시 제가 필요하시면 연락하세요. 도와드리겠어요. 물론 애정적인 문제 만요 제외하구요. (괴로워 져서) 한 사람을 사랑하고 있으면서 또다른 사람을 사랑할수 있다니, (문쪽으로 가며) 지금까진 행복했어요. 당신이 주신 것이지요.
[동석] 경애! 믿어 줘!. 난
[경애] 당신은 역시 착한 사람예요. (애써 웃어 보이며) 갑자기 십년은 늙어진 느낌에요. 이런게 성장했다는 뜻일까요. (하며 현관문을 열려한다. 동휘가 술에 만취가 되서 비를 흠빡 맞은 채 들어온다. 동휘가 방안으로 들어 오자 경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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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피해 밖으로 나가려 한다.)
[동휘] (경애에게) 아니. 어딜 가십니까? 비가 저렇게 쏟아지고 있는데.
[경애] (웃으며) 여자라고 비를 맞으면 안 되나요?
[동휘] 그럼, 정말?
[경애] (문 밖을 보며, 멍청히.) 비가 많이 와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경애 천천히 밖으로 나간다. 아무도 붙잡지 못한다. 빗소리가 더욱 커진다. 동휘, 모든것을 알아차리고 인혜에게 서서히 다가 간다.)
[인혜] (피히며) 왜 이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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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휘] 나가! 이 집에서 당장 나가.
[동석] 형!
[동휘] 나가지 않으면 정말 널 널죽여 버릴테다.
[동석] (사이에 끼며) 형! 취했어!
[동휘] (동석의 멱살을 끌어 잡으며) 내가 취했다구! 이 바보같은 자식아. (동석을 내동댕이 친다. 동석쓰러진다. 그 위에다) 이 자식아! 네가 뭘 안다고. 네가뭘알어. 한여자의 신뢰마저 저버린 자식이
[동석] (너머진 채) 형이야 말로 뭐야 래일이래도 당장 죽게된 늙은이모양 한숨이 내내 쉬고. 아무 것도 할수 없으면서, 바보 위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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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휘] 뭐라구! (동석을 잡아 흔든다) 그래난, 위선자다. 허지만 너마저 나같은 꼭이 되는 게 싫었다. 정말 싫었어.
[동석] (울음을 참으며) 난! 난! 다 알어 안단 말야.
[동휘] (겁에 질려) 뭘! 뭘 안단 말이야!
[동석] (책장에 얼굴을 묻으며) 그만 둬.
[동휘] 거짓말이지? 넌 아무것도 모르지? (동석이 울고만 있자, 동휘는 절망한다. 인혜에게) 네가 말했구나, 네가 말해버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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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혜] (나즉이) 걱정마세요. 불행은 세 사람만으로 충분해요.
[동휘] 그럼.
[인혜] (동석을 가리키며) 저이가 알고 있는 건, 그 옛날에 벌어룶든 축악한 삼각관계, 그것 뿐예요.
[동휘] (지쳐서) 정말 그것 뿐이란 말이지? (인혜 고개를 끄덕인다. 동휘 중얼거리 듯) 그래! 잘했다. 잘했어. (침묵이 안개처럼 짙게 흐른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들은 제각이 모두 지쳐서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다.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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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전화벨이 울린다. 아무도 반음을 보이지 않는다. 벨이 다시 한번 울린다. 인혜가 가려 하자, 동휘가 먼저 가 수화기를 든다. 인혜, 그럴 주시한다.)
[동휘] 아, 여보세요 녜 그렇습니다. 서울서요? 대 주십시요. (잠시 사이) 녜 그렇습니다. 누구요? 허 인혜씨요? (동휘, 잠간 인혜를 보다가) 녜! 말씀하십시요. (놀래여) 녜! 뭐라구요? (인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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녜, 녜, 알았습니다. 그렇게 전하지요. (천천히 수화기를 놓는다. 인혜를 본다. 인혜가 무슨 말이냐고 묻 듯이 그를 보자. 나직히) 허정민씨가 (동석은 그저서 책상에서 몸을 돌리고 인혜는 무슨 뜻인 줄 안다는 듯이 체념한다.)
[동휘] 오늘 아침,--- 자살했어. 「인혜 납처럼 굳어서 의미를 알수 없이 고개를 가만히 흔든다.
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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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5장
4장에서 두 시간 쯤 경과,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지만 좀 뜸하다. 무대는 음산하고 허전하다. 근욱이 잠옷을 입고 중앙 탁자에 혼자서 피곤하게 앉아 있다. 탁자 위에는 술병과 술잔이 그대로 놓여 있다. 이층에서 인혜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가식적이고 일부러 크게 질러대는 소리다. 근욱은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식당 문이 열리며 동휘가 술병을 들고 들어오다가 인혜의 웃음소리에 신경이 쓰여 이층을 한 번 힐끔 처다보나 표정은 평범하다. 동휘는 근욱의 옆 자리로 와 술병을 탁자위에 놓고 앉는다.
[동휘] (술이 좀 깨어서) 부엌을 온통 뒤졌어요. 아무래도 찾을 수가 없어서 식모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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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우려던 참이었는데 이놈이 냉장고 뒤에서 싱글대고 있지 않겠어요? (술을 따르며) 자--- 한 잔 하세요. 아버지하고다 술을 마시다니, 남들이 알면 뭐라겠어요? 허지만 오늘 뿐일 걸, 어때요? (술잔을 근욱에게 내 밀며) 자, 드세요. (근욱이 천천히 눈을 떠서 아들을 바라보자)
그렇게 보지 마세요. 오늘만은 우린 공범자예요. 그러니 한잔 드세요. (근욱 이윽고 술잔을 받아 반쯤 마신다.) 마저 드세요. 취하실 생각이면 아주 취해 버리세요. 어중간 해선 영 기분이 잡쳐 버려요. 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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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욱, 마자 마신다.) 됐어요. 아버지도 보통이 아니시네요. 오늘 밤은 멋이 있어요. 남자란 역시 술잔을 들고 있을 때가 제격이거든요. 그잔 이리 주세요. (근욱에게서 잔을 받아 소주 손수 따라 한 잔을 다 마신다. 근욱에게 잔을 내 밀며) 더 하시겠어요? (근욱 대답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제가 못 마땅하신 모양이군요. 아버지, 허지만 상관할 것 없다니까요. 우린 공범자니까--- .
[근욱] (쉬고 가라앉은 소리로) 저 애들한테 좀 가 봐라, 아까부터 무슨 얘기가 저리 길까?
[동휘] 내 버려 두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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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욱] 걱정이 돼서 그래, 다 큰 것들이.
[동휘] 설마 무슨 일이 일어나려구요. (두 사람 이층에 신경을 모은다. 피아노 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서투른 솜씨라 박자도 음도 엉망이다. 그 불협화음이 오히려 더 그들 두 사람을 불안하게 한다.)
[동휘] (화가 나서) 이 밤중에 웬 도깨비같은 피아노야, 굿이라도 할 모양이지.
[근욱] (불안해서) 얘--- 넌 그 사람이 왜 죽었다고 생각하니
[동휘] (짜증이 나서) 누구요?
[근욱] 그 사람말이다. 그 사람이 왜 자살했느냐 말이다.
[동휘] 자살이 아녜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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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욱] 자살이 아니믄?
[동휘] 자살이 아니구, 그저 자연사예요.
[근욱] 자연사라! 그래 자연사.
[동휘] 아버지나 나나 마찬가지지요.
[근욱] (화를 내며) 마찬가지라니? 무슨 소리냐!
[동휘] 우린 벌써 옛날에 이미 죽어버린 거예요. 허정민씨처럼 공식적인 사람이 필요하다면
[근욱] (고집스럽게) 닥쳐라! 저 말버릇이라니.
[동휘] 고집 부리지 마세요. (남은 술을 마시고) 허긴 아버지야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시겠지요. 그 사람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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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했다. 자살한 건 죽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난 자살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난 아직 살아 있는 것이지 뭐겠느냐?
[근욱] 또 시작이구나. 넌 술만 마시면 그놈의 뚱딴지같은 횡설수설이지. 예나 지금이나 똑 같애. (피아노 소리가 뚝 그친다. 두 사람 긴장한다. 잠시 사이, 다시 피아노 소리가 계속된다.)
[근욱] (참을 수가 없어) 술 한 잔 다오, 목이 탄다.
[동휘] (취해서 웃으며) 드디어 실토하셨군요. 목이 탄다 목이 타.
[근욱] (간절하게) 얘 그러지 말고 네가 한 번 올라가 보렴,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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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휘] (싱글거리며) 둘이서 한 침대 속에서래두 기어 들어갈까봐 겁이 나세요?
[근욱] (부인하려고 애 쓰며) 무슨 소릴, 한 침대라니? 그런.
[동휘] 알 게 뭐예요, 그애는 아무 것도 모르는 걸요. 게다가 인혜는 제 아버지가 자살했으니까 말이 아니게 돌아버렸거든요.
[근욱] (딴청 부리며) 동석이 그앤 결국 경애한테 다시 돌아갈 거다. 그앤 너완 달러.
[동휘] 그럼요. 그렇지요. (화가 나지만 애써 참으며) 끝까지 속일 셈이지요. 그 비밀을 아는 세 사람 중에 이젠 자기 만이 남았다고 춤이라도 추시고 싶으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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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욱] (간신히) 네가 뭘--- 안다고.
[동휘] 이젠 나까지 바보 취급이군요.
[근욱] 뭐라고 했니?
[동휘] (아버지를 경멸하며)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다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내가 뭣 때문에 당신들의 과오 속에 뛰어들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망쳐버릴 이유가 있었겠어요.
[근욱] 술 한잔 다오.
[동휘] 아버지같은 사람이 알 게 뭐예요. 아버지한테 말해봤자 공연한 헛 수고지. 기껏해야 이렇게 말씀하시겠지요. 네가 무슨 상관이냐? 내가 무슨 짓을 했건. 넌 모른체하구 네 인생이나 착실이 살아갔으면 됐지 않느냐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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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욱이 애원하 듯 아들을 본다. 동휘 그가 측은해져서) 이제 와서 이렇궁 저렇궁 해 봤자 누워서 제 얼굴에 침 뱉기지요.
[근욱] (체면을 잃지 않으려고) 내게두 할 말은 있다만 그만 두겠다, 아무튼. (아들의 등을 처 주며) 그래, 그만 두자. (이층에 신경이 쓰여 한번 보고) 근데 넌 동석이에게 그 얘길 해 줬니?
[동휘] 제가 직접할 순 없었어요.
[근욱] 응--- 왜?
[동휘] 그애가 어떻게 나올지 두려웠거든요.
[근욱]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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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휘] (생각에 잠기며) 아버지 말씀대로 그 앤 나와는 다른 점이 있어요. 그 앤 좀처럼 남의 인생에 뛰어들지 않아요. 하지만 모를 일이거든요. 만일 그 얘길 해 줬다 그애가 나와 똑같은 충격을 받는다면--- 아마 미치거나 자살하고 말 거예요. 그앤 결단성이 있으니까요.
[근욱] 그래, 말하지 않길 잘 했다. (믿으려고 애 쓰며) 그앤 결국 좋아질 거다.
[동휘] (멍하니) 인혜, 그애를 첨 만났을 때두 저렇게 비가 내리고 있었어요. (잠깐 사이, 근욱이 비난하며) 전 가만 있을 수가 없었어요. 전 그애를 만나야 한다고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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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했어요. 왜냐하면 그앤--- . (자조하며) 핏줄이란 이상해요. 어딘가 땡기는 법이거든요. 전 단박에 알아 채렸어요. (조용하게 말을 계속한다.) 그 때 주위는 어두웠고 그리고 더러웠어요. 밤은 냄새 속에서 꿈틀거리고 그애는 초라한 움막의 처마 밑에서 쭈구리고 있었어요. 내가 물었어요. 「얘, 넌 왜 거기 서 있니?」 그 애는 얼굴을 들지 않았어요. 내가 다시 물었어요. 「얘, 넌 집이 없니? 왜 비를 맞고 서 있지?」 그러자 그애가 얼굴을 획 처 들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 보는 것이었어요. 그애의 크고 검은 눈동자엔 아무 표정도 없어서 마치 나는 어두운 빈 방에서 갑자기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보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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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이 굳어져 오는 것을 느꼈어요. 그 앤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앴어요. 「그렇게 보지 마요, 난 짐승이 아녜요.」
[근욱] (나직이) 그만, 그만 해라.
[동휘] 마르고 배 고파 보이는 한 어린 계집아이가 그 순간 제 가슴을 치고 지나 간 거예요. 그 뿐이지요. (맘 속의 것을 다 털어 놓고 시원해서) 한 때는 아버질 원망하기도 했지요. 허지만 지금은---
[근욱] 지금은--- ?
[동휘] 그 사건은 내 나름의 상처였고, 아버지 것은 아니었어요. 역시 나만이 해결해야 될 문제거든요. 털어놓고 나니 시원하군요.
[근욱]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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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잘 했다. 잘 했어. (피아노 소리 갑자기 멎는다. 근욱 긴장해서) 왜 그랬을까?
[동휘] 뭐요
[근욱] 피아노 치는 소리
[동휘] (그제야 알고) 정말, 멎었군요.
[근욱] 넌 알겠니?
[동휘] 아마 얘기하고 있겠지요, 뭐.
[근욱] 아니 아니다. (일어난다)
[동휘] 올라가 보시려구요?
[근욱] (막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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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 있어 봐, 너 무슨 소리 못 들었니?
[동휘] ??
[근욱] 지금 무슨 소리가 났다.
[동휘] 그만 두세요. 아무 일두 없어요.
[근욱] 아무래두 그애한테 말해 줘야 하겠다.
[동휘] 말하지 않는 게 좋아요. 인혜두 결국 떠날테지요.
[근욱] (막연히) 어디루 말이냐?
[동휘] 알 수 있을 것 같애요. 그 애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
[근욱] 그래?
[동휘] 인혜는 아무 일도 안 할 거예요.
[근욱] 나도 그렇게 믿고 싶다. (그러나 불안해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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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아니다. 그래도 동석이에게 사실을 알려줘야 하겠다.
[동휘] (완강하게) 어쩌시려구요? 동석이 마저 그 불행한 과거 속으로 끌어 들이고 싶으세요?
[근욱] 그렇지만, 말할 수 밖에 없지 않니?
[동휘] 그만 두세요, 아버지. (근욱 어쩔줄을 모른다. 그러나 결국 그는 이지적인 자기 중심에 빠진다. 그는 재빨리 이층으로 간다. 그 때 피아노 음이 격정적으로 시작된다. 그랬다. 금새 그친다. 근욱 그 자리에 굳어 버린다. 잠시 후 그 불규칙한 피아노 소리가 다시 계속된다.)
[동휘] 앉으세요. 그리고 기다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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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욱] 참을 수가 없구나.
[동휘] 참으셔야 되요. 아버지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이 받은 고통에 비하면 이쯤은 아무것도 아녜요. 가장 가벼운 형벌이지요.
[근욱] 나라고 맘이 편하진 않았다. (무서워져서) 넌 설마 내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그 변명을 대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동휘] 아버지두, 참 딱두 하시네요. 지금 와서 그게 무슨 소용예요. 어쨌든 과거는 이미 정해져 버린 걸요.
[근욱] 네 생각도 그러니?
[동휘] (술을 따르며) 자, 가만히 기다려요.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그것 뿐이잖어요. 잘 될 것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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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잔을 내 밀며) 마시겠어요?
[근욱] 싫다. 너나 마셔라.
[동휘] (마시며)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인혜에게 모든 것을 맡기다니, 그 애의 결정만을 기다리는 꼴이거든요,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되세요.
[근욱] 그래, 그 생각이다.
[동휘] 진심으로요?
[근욱] 그렇다니까.
[동휘] 우린 난생 처음 같은 생각을 했군요. 좋은데요. 하지만 별수 없지요. 어차피 우린 무기력해진 걸요. (두 사람 잠시 말 없이 앉아 있다. 빗소리가 조금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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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휘] (정원으로 시선을 주며) 비가 더 쏟아지는 모양이지요? 밤새도록 올 모양이예요.
[근욱] (식사하며 얘기하 듯이 자연스럽게 말한다) 누구나 수 많은 꿈과 가능성을 지니고 출발을 시작하지만 결국 남는 건 회한 뿐이다. 남는 건 죽음만도 못한 회한 뿐이란 말이다. 그렇지, 자기의 소망을 이루는 사람은 가믐에 콩 나기다. (동휘는 취해서 탁자 위에 얼굴을 파 묻고 잠들어 있다. 근욱 상관 없이 얘기를 계속한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한 번 씩은 무슨 실순가 저지르지 않니? 그래, 누구나 그래, 어떤 사람은 잊어 버린 척 하구, 또 어떤 사람은 회개한 척 하거든, 허지만 그 실수는 망령처럼 늘 뒷꽁무니를 졸졸 따라 다니기 마련이다. 아무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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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까. 우린 사실에 있어 너무나 일찍암치 인생을 포기해 버린단 말이다. 미련 투성이구 너절한 변명에다 그 집착이라니. 얘야, 난 잘 모르지만, 사람들은 거짓말만, 되풀이 하건든. 근데 내가 그걸 깨달았을 땐 이미 너무 늦었드란 말이다. (피아노 소리 어느새 그쳐 있다. 그는 그것을 모른다.) 난 정말 미쳤다. 그리고 내자이 싫어졌다. (쓸쓸히 웃고) 이 봐라. 날 좀 봐. 얼마나 많은 오욕의 나날을 남 몰래 부끄러워 하며 지내 왔는 줄 아니? (동휘를 흔든다. 일어나지 않는다.) 얘, 자고 있니? 자고 있느냐 말이다. (등을 쳐주며) 그래, 자거라. 자는 게 좋겠다. 나도 그만 쉬었으면 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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겠다. 정말 피곤하구나. (근욱 피곤하게 눈을 감는다. 잠시 침묵, 빗소리만 요란하다. 근욱 갑자기 눈을 번쩍 뜬다. 피아노 소리가 그친 것을 깨닫고 점점 불안해 진다. 동휘를 흔들어 깨운다.)
[근욱] (떨리는 목소리로) 얘, 그만 좀 일어나 봐라. (반응이 없다.) 얘, 일어나라니까, 제발.
[동휘] (고개만 들고) 녜?
[근욱]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는구나.
[동휘] 뭐가요?
[근욱] 피아노 소리가 말이다. 언제 그친지 모르게 그쳐 버렸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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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휘] 그래요?
[근욱] 남의 얘기하는 듯 하구나. 정신 좀 차려라.
[동휘] (마음이 느긋해서) 방울 단 고양이 같군요. 귀엽잖아요? 우린 여기 있습니다. 자--- 피아노를 칩니다.
[근욱] (화가 나서) 날 놀리지 좀 마라. (아무래도 걱정이 되서) 제발 부탁이다. 하다못해 네가 그 방에 같이 있기라도 하렴.
[동휘] (근욱에게 바싹) 아버지, 그만 말 해 버립시다. 녜?
[근욱] 왜 이 모양이냐 그 새 맘이 변했니? 자면서 그 따위 생각들을 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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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휘] 전 이젠 아무 상관도 없어요. 단지 혈연이라는 관계외에는---
[근욱] 점점 엉뚱한 소리만 하는구나. 뭐가 어떻게 됐다구?
[동휘] 인혜가 가만 있지 않을 거예요.
[근욱] (완강하게) 내일 아침 그애와 단 둘이서 만나겠다. 그리구 따져보겠다. 그애도 결국은 날 이해해 줄 거다.
[동휘] 이해라구요?
[근욱] 그 애가 이 집에서 떠나고 나면 다시 옛날 같아진다. 우린 행복해질 수 있다.
[동휘] 그럼, 인혜는 어떻게 되지요?
[근욱] (화를 벌컥 내면서) 넌 도대체 어느 편이냐?
[동휘] 어느 편이라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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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욱] 동석이가 상처를 받아도 좋단 말이냐?
[동휘] 아버지! 이러다 인혜가 자살이래도 하면 어떡하시겠어요?
[근욱] 할 수 없지. 그럼 나더러---
[동휘] 어쩌면, 그런 소릴! 인혜는 당신의 자식이 아닌가요!
[근욱] (벌떡 일어나며) 닥쳐라! 망할 자식. (자기의 약점을 깨닫고 도루 앉는다) 물론 인혜도 내자식이지. 허지만 인혜는 내가 아버진 줄 모르고 있고, 또--- .
[동휘] (어이가 없어) 뭐라구요? 모르고 있다구요?
[근욱] 그럼, 그애가--- .
[동휘] (고개를 흔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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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딱하시군요, 어떻게--- .
[근욱] 그럼 알고 있단 말이냐?
[동휘] 당장이래두 이 집을 나가고 싶군요. 그런 식으로 자신을 기만하고 계시다니--- .
[근욱] (안타까워서) 말해 봐라. 어떻게 된 거냐? (하다가 주춤하고) 그럼, 네가--- ?
[동휘] (홱 돌려) 아니요. 전 아녜요. 하지만 저두 그애가 모르고 있길 바랬어요. 그렇게 믿구 싶었어요.
[근욱] 그런데--- ?
[동휘] 꼬치 꼬치 캐지 좀 마세요. 지금 와서 그애가 어떻게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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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비밀을 알게 되었는가 따지고 싶으세요!
[근욱] (혼란에 빠져) 그럼, 도대체 그앤!
[동휘] 인혜는 영리한 애예요.
[근욱] 무슨 뜻이냐?
[동휘] 제가 아는 건 그앤 복수를 결심했고 지금--- 그것을 차근차근히 실해해 나가고 있다는 것 뿐이예요.
[근욱] (변명하듯) 도대체 무슨 복수를 하겠다는 거냐? 무슨--- . (자신도 믿지 않으면서) 복수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앤 그저 외로웠을 거다. 「아버지.」 그리곤 웃겠지. 부끄럽겠지. 「이제부턴 아버지라고 부르게 해 주세요. 여기서 같이 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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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사이) 그럼 끝나는 거다. (확신을 가지려고 애 쓰며) 그렇다니까!
[동휘] 그럼 오죽이나 좋겠어요.
[근욱] 넌 믿지 않겠지? 넌 언제나---
[동휘] (화가 나서) 네! 알아요. (하는데 이층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린다. 두 사람 긴장한다)
[근욱] (정말 참을 수가 없어) 분명히--- 무슨 일이--- (나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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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네가 올라가 봐라.
[동휘] (역시 두려워하며) 싫어요.
[근욱] 어서
[동휘] 싫다니까요.
[근욱] 네가 정 싫다면 좋다, 나래두 올라가마. (가려 한다)
[동휘] (막으며) 그만 두세요.
[근욱] 왜 이러느냐! 비켜라.
[동휘] (잡으며) 제가 올라가겠어요.
[근욱] 그만 둬라. 내가 가마. 내가 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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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휘] (놓으며) 얘기하시겠어요?
[근욱] 뭐라구?
[동휘] 동석이에게 인혜는 네 동생이다구 얘기 하시겠느냐 말예요?
[근욱] (제 자리로 오며) 안 된다. 그건.
[동휘] 그러니까 제가 가겠어요. (돌아선다)
[근욱] 아무 말도 해선 안 돼!
[동휘] (격해서) 왜요! 하구야 말겠어요.
[근욱] (달려들며) 망할 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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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욱이 동휘를 때린다. 동휘는 아버지의 두 팔을 잡고 억지로 의자에 앉힌다. 그땐 동석이 우울한 표정으로 이층에서 내려온다.)
[근욱] (의자에서 일어나려고 애쓰며) 이 손을 놔라, 손을.
[동휘] 가만히 앉아계세요.
[근욱] 이 불효자식아!
[동석] (가만히 보고 있다가) 왜들 그러세요? (두 사람 놀랜다)
[동휘] 아니, 언제 내려왔니?
[근욱] 얘야! 아무 일두 없었겠지?
[동석] 한꺼번에 둘씩 물어보믄 어떡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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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욱] 대답해라. 인혜와 뭘하고 있었니?
[동석] (태연하게) 피아노 치구 얘기하구---
[근욱] 또?
[동석] 그 뿐예요. (두 사람의 시선을 느끼고) 왜들 그렇게 보세요. (두 사람 황급히 시선을 돌린다.) 인혠 불쌍한 여자드군요.
[근욱] 응?
[동석] 어렸을 때 고생한 얘기를 하는데 (고개를 흔들며) 울었어요. 막.
[근욱] 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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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석] 사람은 누구나 남모르는 괴로움이 있는 모양이지요?
[근욱] 응. 그래? 그래!
[동휘]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단 말이냐?
[동석] 네! 왜 자꾸 이상한 질문만 하시요. 뭐가 잘못 됐어요?
[근욱] 아니다. 아냐.
[동휘] 내 말을 잘 들어.
[동석] 녜?
[근욱] 야!
[동휘] 사실은 말이다---
[근욱] 닥치지 못하겠니!
[동석] 말씀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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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휘] 사실은, 사실은---
[근욱] 제발, 얘야! (이 때 이층에서 인혜가 투명한 잠옷 차림으로 마치 홀린 듯이 내려온다. 그녀의 표정은 요염하고 매혹적이다. 세 사람 놀란다. 인혜 계단을 다 내려와서도 그들을 보지 않는다. 숨 막힐 듯한 침묵히 계속된다)
[인혜] (백지처럼) 끝났어요, 전부 끝났어요.
[근욱] (중얼거리듯) 끝났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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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혜] (나직이) 어머니, 보세요. 구원 받을 수도 없지요? 우린 말예요.
[근욱] (비틀거리며) 설마--- 네가--- (근욱 졸도한다)
[동석] 아버지, 아버지. (근욱을 부축한다.) (동석 도움을 청하듯 동휘를 보다. 동휘는 살기에 차서 그에게 조금씩 다가간다. 동석 놀래서 주춤 물러선다. 의자에 걸려 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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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휘] (나직이) 말 해라. 무슨 일이 있었는가?
[동석] (안타까워서) 아무 일도 없었다니까요. 아무일도! (동석이 항의하 듯 두 손을 벌리는데 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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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6장
다음 날 새벽. 비는 개였다. 마침 햇살 한 줄기가 어두운 거실한 귀퉁이를 서서히 파고 든다. 방 안은 어지 럽혀진 채다. 동식이 테라스 창 가에 서서 밖을 내다 보고 있다. 햇빛이 그의 전신을 감싸고 있다. 잠시후 이층에서 동휘가 푸석한 얼굴로 내려온다. 동석을 발견하고 미소한다. 그는 중앙 탁자에 와 앉는다.
[동휘] 마치 폭풍이 지나간 후의 아침 같다. (담배를 꺼내 피워 문다.) 이젠 한시름 놨다. 젠장! 밤새껏 눈 한 번 못 부 쳤드니 죽을 지경이다. (반응이 없어. 동석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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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뭘 하고 있니?
[동석] 응.
[동휘] 뭘 하고 있어?
[동석] (천천히) 좀 전까지 저기 샛별이 있었어. 모든 별들이 숨어버리는데도 그 놈만은 빛나고 있더군.
[동휘] (막연히) 그래?
[동석] 참 이상하거든. 별들 말야. 수많은 별들이 쉴새 없이 움직이고 있는데두 사고 한 번 안 나거든. 언제나 변함 없는 거리. 같은 속도. 알 수 없단 말야.
[동휘] 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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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석] 형, 그런 질서가. 그 엉뚱한 지혜가 어떻게해서 생겼을까?
[동휘] (미소하며) 넌 알지 않니?
[동석] (고개를 저으며) 모르겠어. (잠시 침묵이 흐른다.) 인혠--- , 지금--- .
[동휘] 응 아버지 방에 있다. (동석이 움직인다) 그앨 만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여간 그런 생각이 든다. 그앤 지금 꼭 백치 같다. 빈 껍데기란 말이다.
[동석] 빈 껍데기.
[동휘] 그앤 살아간 능력을 잃었다. 그건 목표가 없기 때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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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석] 결국 내 버려둘 수 밖에 없군요.
[동휘] (끄덕이고) 자신이 해결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볼수 밖에 없다. (얘기를 돌리려고)
참 의사가 그러는데 아버진 걱정 없대드라.
[동석] 그래요--- .
[동휘] (눈을 찡긋해 보이며) 너두 알지 않니, 아버지야 쇠 힘줄보다 단단하시거든.
[동석] 그래, 아버진 걱정 없을 거야.
[동휘] 그리구--- 저, 나 말이다. 아버지가 좀 회복되시면. 당분간 혼자 있을 작정이다. 응. 저. 오핸 마라. 난 다만.
[동석] (지긋이) 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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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휘] 옛날 친구들은 만나지 않겠다. 모두 새로 시작 하는 거다. 한번에 활계 치며 자유스럽게 살아보고 싶다. 지금은 마치 새 처럼 가쁜하다. (미안해져서) 네 걱정은 하지 않겠다. 물론네 앞길이 순탄할지 어절진 잘 모르겠다만, 까짓것 무슨상관이냐. 자신의 인생을 자신만이 결정할 수 있다는 건 흐뭇한 일이다. 난 오히려 네가 부럽다.
[동석] 형두 이젠 자유스러워 진 것 아니우?
[동휘] 그래. 우린 이제 부터다. 지금부터 새로운 생활을 쌓아가는 거다. (홀가분하게) 자. 난 이층에 좀 가 봐야 겠다. 너두 곧 올라오렴. (동휘 이층으로 올라간다. 동석 잠간 생각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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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결심하고 전화기가 있는 곳으로 간다. 수화기를 든다.)
[동석] 여보세요. 교환이지요? 장거리 부탁합니다. (이때 현관문이 열리며 경애가 비에 젖은 옷을 그대로 걸친 채 가만히 들어 와서 동석을 본다.) 서울인데요. 네 칠십이국에 삼·일·오·삼. 네. 빨리 좀 대 주십이요. 고맙습니다. (수화기를 놓고 천천히 돌아선다. 경애를 보고, 그만 말문이 막혀서) 경애. (자세히 살펴보고, 간신히) 비를 맞었군.
[경애] (지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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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워요.
(소파에가 않는다.)
[동석] (상의를 벗어 걸처 주며) 밤새 어디서 지냈어?
[경애] 여관에서 잤어요.
[동석] 비를 몹씨 맞었군. 이러다 병나겠어.
[경애] 괜찮어요. (슬픔이 끊어 올라) 사실은 어젯 밤은 밖에서 새웠어요. 밖에서 동석씨가 자고 있을 방을 처다 보고 있었어요.
[동석] 경애--- .
[경애] 무서웠어요. 몇 번이나 문을 두들길려고 했어요. 허지만 그럴수 없었어요. 생전 처음 전 외로움이 뭔지를 알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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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당신을 이해할수 있었어요. 그리구 저혼자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피곤에 지쳐서 울며) 전 잘 모르겠어요. 뭔가 전과는 달라졌다는 것은 알수가 있었지만 허지만 그 외는--- .
[동석] 잘 돌아왔어--- .
[경애] 아침이 되자 당신에게 마지막으로 작별인사를 해야된다고 생각했어요. 전 아무래도 여자니까 그렇지요.
[동석] (경애의 손을 잡으며) 이젠 걱정 없어.
[경애] (피하며) 그만두세요. 전 가겠어요. 밖에서 떨며, 집안에서 새어나오는 불빛들이 얼마나 다정하고 포근한 것인지. 전 정말 쉬고 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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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어요. 그럿치만 제가 쉴 곳은 제가 찾을수 있어요.
[동석] 내가 용서를 빌어두--- ?
[경애] 누가--- 누구를 용서하겠어요. 경애, 부탁이야. 내 곁에 있어 줘. 제발--- . (경애를 응시한다.)
[경애] 그럼--- 제 부탁을 먼저 들어 주시겠어요?
[동석] 뭐든지.
[경애] (애정에 차서) 제 곁에 있어 주시겠어요? (두사람 와락 포옹한다. 이층에서 인혜가 가방을 들고 내려온다. 포옹하고있는 두 사람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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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를 알수 없는 미소가 조용히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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